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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36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경상북도 청도 지역의 역사.

[개설]

청도 지역은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청도 지역에서는 1881년의 영남 만인소 운동과 1894년의 동학 농민 운동으로 대표되는 위정척사 운동이나 반제 반봉건 운동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청도 사람들도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지 사족을 중심으로 창의하였던 역사적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이 점증하면서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

1866년 병인양요에 즈음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위정척사 운동에 동조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고자 했던 이들 중 운강 박시묵이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시묵은 청도 지역의 의병 소모책이 되어 “임진왜란에 우리 선조 14의사(義士)는 부자·형제·종형제 중에서 배출되었으며, 혹 순절하여 벼슬을 받고, 혹 난을 평정하고 공훈을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아비가 부르면 아들이 받는다는 가르침이 집집마다 전하니 어찌 산곡에 숨어서 나라의 근심을 좌시한 채 나아가 구하지 않으리오. [중략] 오는 25일까지 일제히 선암 서원(仙巖書院)에 모여 기의(起義)하자.”라는 통문을 발하였다. 나아가 그는 청도 지역의 각 문중에도 “군부(君父)의 보위(保衛)가 첫째요, 사교(邪敎)의 배척(排斥)이 둘째”라는 통문을 발하여 의병에 동참하도록 호소하였다. 그 후 청도 지역의 유림들은 1881년의 영남 만인소 운동이나 1895년 을미의병이 제기되었을 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박시묵과 그의 아들 박재형정재 유치명의 문인이었다. 그리고 박영곤(朴永坤)·박영수(朴永壽)·이상연(李祥演)·박정형(朴廷瀅)·장화식(蔣華植)·장한도(蔣漢燾) 등은 안동 의병을 주도했던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제자들이었다. 유치명의 제자들은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1881년 영남 만인소 운동을 주도하였고 김도화김흥락을 비롯하여 그 제자들이 1895년 이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청도 지역의 유림들도 한말의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인식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권 회복 운동]

개항기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면서 청도 지역에서도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 나타났다.

의병 항쟁은 1895년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청도 지역의 유림들은 창의를 하거나 참가한 경우가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청도 지역의 의병항쟁은 윤만파(尹萬坡)최한룡(崔翰龍)이 독자적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고, 대체로 주변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 진영의 지역 분대로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청도 지역의 계몽 운동은 비교적 활발하였다. 개항기의 격변 속에서 일찍부터 청도 지역은 많은 변화를 보였다. 이것은 경부선 철도의 부설이나 이웃 대구부의 급격한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던 청도 유림은 대체로 선각적인 유림이었다. 이들은 중앙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계몽 운동 단체의 지방 지회에 참여하거나 독자적으로 청도 지역에서 계몽 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을미의병 이후 청도 출신의 선각적인 유생 이최한(李崔翰)이 1904년 8월 조직된 충의사(忠義社)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1906년 8월 유력한 청도 유림의 지지 속에서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 청도군 지회(淸道郡支會)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계몽 운동의 기운이 청도 지역에도 확산되고 있었다. 1908년 교남 교육회(嶠南敎育會)가 조직되자 청도 출신의 선각적인 유림이 다수 참여함으로써 청도 지역에도 계몽 사상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1907년 이후 청도 유림은 청도군 민의소(淸道郡民義所)를 비롯하여 운산 친목회(雲山親睦會)간친 교육회(懇親敎育會) 등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淸道郡國債報償義捐會)가 조직되면서 청도 민의소를 장악하고 있던 유림들이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유림들은 선각적인 유림들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구국 운동(敎育救國運動)에 참여하였다.

대한 제국 시기 청도 지역의 국권 회복 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 같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청도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은 의병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계몽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보수적인 유생이었다. 최한룡은 의병 항쟁을 전개하면서 국채 보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참봉 김일준이 정기 구독하고 있던 『대한 매일 신보』를 통해 「이집트 근세사」를 접하고 국제 정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의병 항쟁과 계몽 운동이 서로 배타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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