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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08
한자 豊角縣
이칭/별칭 유산(幽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각북면|각남면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강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940년연표보기 - 유산현에서 풍각현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1018년 - 풍각현이 밀성군의 속현이 됨
개정 시기/일시 1684년 - 풍각현의 4개 면이 대구부에 편입
개정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풍각현 청도군에 이속되어 풍각면으로 개편

[정의]

940년부터 1906년까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각북면·각남면 일대에 있던 행정 구역.

[개설]

신라 시대의 상화촌현(上火村縣)으로 757년(경덕왕 16)에 유산현(幽山縣)으로 개칭 후 화왕군(火王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초의 군현제 개편 때 풍각현(豊角縣)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018년(현종 9)에 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1684년(숙종 10)에 풍각현의 4개 면이 대구에 편입되었다가 1906년 청도군에 이속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후삼국 통일 전쟁이 일단락된 후에는 전반적인 체제 개편의 일환으로 고려 태조 때인 940년(태조 23) 지방 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혁되었다. 이러한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유산현풍각현으로 개칭되었다.

[관련 기록]

풍각현의 지명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밀성군 풍각현 조이며, 이후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나 읍지 등의 자료는 대부분 『고려사』 지리지를 따르고 있다. 다만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전 지리지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이 전한다.

『고려사』 지리지 풍각현 조에 의하면 “본래 상화촌현인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 내속되었다.[本上火村縣 高麗改今名 顯宗九年來屬]”라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풍각현 조에 의하면 “옛 상화촌인데 삼국 시대 때 풍각현으로 고쳤다. 고려 초 청도 임내에 소속되었다. 그 후 밀성 임내로 이속되었는데 연대는 미상이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른다.[古之上火村 三國時改豊角縣 高麗初屬淸道任內 厥後移屬密城任內年代未詳 本朝因之]”라고 하였다.

또 청도군 조에 의하면 “고려 초에 풍각현이 소속되었다. 두야보 부곡은 지금은 밀양 임내가 되었는데 그 연대는 미상이다.[高麗初所屬豐角縣 豆也保部曲 今爲密陽任內 其年代未詳]”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 도호부 속현 풍각현 조에 의하면 “부의 서북쪽 50리[19.636㎞]에 있다. 본래 상화촌현인데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내속되었다[유산이라고도 한다].[在府西北五十里 本上火村縣 高麗改今名 顯宗九年來屬(一名幽山)]”라고 하였다.

『대동지지』 대구 고읍(古邑) 풍각 조에 의하면 “부의 남쪽 70리[27.491㎞]에 있고 밀양과는 동남쪽으로 50리(19.636㎞) 떨어져 있다. 본래 상화촌인데 경덕왕 16년 유산으로 개칭 후 화왕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 풍각으로 고치고 현종 9년 밀성에 속했다. 본조 현종조에 내속되었다.[南七十里 東南距密陽五十里 本上火村 景德王十六年改幽山爲火王郡領縣 高麗太祖二十三年改豊角 顯宗九年仍屬密城 本朝顯宗朝來屬]”라고 하였다.

또 방면(坊面) 조에 의하면 “각현내[남쪽으로 끝은 70리(27.491㎞)이다], 각북[남쪽으로 처음은 50리(19.636㎞)이고, 끝은 70리(27.491㎞)이다], 각초동[남쪽으로 처음은 70리(27.491㎞)이고, 끝은 100리(39.273㎞)이다], 각이동[남쪽으로 처음은 80리(31.418㎞)이고, 끝은 100리(39.273㎞)이다], 각남[남쪽으로 처음은 70리(27.491㎞)이고, 끝은 100리(39.273㎞)이다] 앞의 5면은 풍각고현 땅이다. … 두야보 부곡은 풍각고현 땅이다.[角縣內 南終七十 角北 南初五十終七十 角初同 南初七十終一百 角二同 南初八十終一百 角南 南初七十終一百 右五面豊角古縣地... 豆也保部曲在豊角古縣地]”라고 하였다.

『숙종실록(肅宗實錄)』 권15 숙종 10년 3월 17일[癸未] 조에 의하면 “묘당(廟堂)에서 복의하기를, ‘하양·경산을 합속시킨 것은 옛일이 있기는 하나 매우 어려운 일이니, 성주의 화원 8방과 밀양의 풍각 4면을 대구에 갈라 붙여서 영중(營中)의 용도를 돕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廟堂覆議言 河陽·慶山之合屬 雖有故事 事涉重難 星州之花園八坊 密陽之豐角四面 劃屬大丘 以濟營中之用 許之]”라고 하였다.

[내용]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풍각현은 본래 상화촌현으로 고려 때 명칭이 개정된 후 1018년(현종 9)에 밀성군에 내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경상도지리지』에서는 고려 초에 청도군에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대동지지』에서는 상화촌현이 757년(경덕왕 16)에 유산으로 개칭 후 화왕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인 940년(태조 23)에 풍각으로 개칭되었다고 하여 앞의 두 기록보다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관련 기사들이 조금씩 다르지만 확실한 것은 풍각현의 신라 때 이름은 상화촌현이었고 고려 초에 풍각으로 개칭 후 1018년에 밀성군의 영현이 되었다는 점은 공통된 사실이라고 하겠다.

한편 조선 시대에 와서 풍각현은 『대동지지』에 의하면 “현종 연간(1641∼1674)에 대구부에 내속되었다.”라고 하였지만,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 10년(1684)에 밀양의 풍각 4개 면을 대구에 갈라 붙였다.”라고 하여 대구 편입 시기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변천]

신라의 상화촌현이었다가, 757년 유산현으로 개칭 후 화왕군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 풍각현이 되었다가 1018년 밀성군에 내속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로 경상 감영이 옮겨오고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1684년(숙종 10)에 밀양의 풍각 4개 면이 대구에 편입되었다. 1906년 옛 풍각현 지역인 대구군 소속 각북면·각현내면·각초동면·각이동면 이상 4개 면이 청도군으로 이속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현내면 일원과 이동면 일원을 합쳐서 풍각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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