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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004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12월 14일 - 운문댐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6월 1일 - 운문댐 건설 지원 전담 기구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9월 29일 - 운문댐 보상 심의 위원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11월 - 운문댐 수몰 지역 1차 보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9월 29일 - 운문교 건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8월 - 운문댐 수몰 지역 지표 조사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3월 1일 - 운문 초등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3월 1일 - 문명 중학교, 문명 고등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3월 1일 - 지촌 초등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 4월 13일 - 운문댐 완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11월 15일 - 망향정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3월 3일 - 운문댐 수몰 가구 명단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11월 2일 - 운문교비 건립
관련 지명 망향정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지도보기
관련 지명 운문교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방지리지도보기
관련 지명 운문댐 하류 보유원지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방지리지도보기
관련 지명 대천리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지도보기

[개설]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실시된 운문댐 건설로 인하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운문댐 착공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사라진 고향에 대한 실향민들의 추억과 향수가 망향정 등을 통해 역사로 남아 있다.

[그리움의 흔적, 망향정]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청도로 이어지는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 산을 넘으면 눈앞에 운문댐이 넓게 펼쳐진다. 운문댐을 눈에 담고 도로를 계속 따라 산을 내려오면 운문댐국도 20호선과 만나는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에서 오른쪽 내리막길로 조금만 가면 2층 높이의 ‘망향정’이라는 정자가 보인다. 망향정은 시멘트로 조성된 건물이다. 정자 안에 들어서면 운문댐이 건설로 수몰되기 전 마을의 전경 사진이 걸려 있다. 정자의 건립 배경을 알리는 초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유서 깊은 운문골 물속에 두고 이웃 간의 인정은 가슴에 담아 정든 내 고장 운문을 떠나지만 정다운 고향산천 그리워 다시 찾아오는 이웃 동기 쉬어 갈 망향정을 여기 세우다.”

망향정은 1985년 운문댐 건설과 함께 수몰된 운문면의 일곱 개 마을, 2,833명의 이주민들을 위하여 1998년 청도군에서 세운 정자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에서 운문댐 수몰로 인하여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운문면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곳 주민들은 캄캄한 바다에 던져진 조각배이고, 사막에 떨어진 씨앗 같은 미물이 되고 말았다는 데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근본을 잃어버린 공허함을 사막에 떨어진 씨앗으로 비유한 글귀에서 아련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망향정 주변에도 실향민의 공허함과 슬픔을 달래기 위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망향정 좌측에는 높이 약 70㎝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전면에 수몰된 행정 지명과 가구수가 적혀 있다. 망향정 우측에는 높이 약 2m의 운문교비가 세워져 있다. 운문교비 전면에는 1932년 개교한 운문 초등학교가 수몰되어 폐교되기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수몰된 학교 교정을 그리워하며 운문 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들이 세운 것이다. 망향정에서 가까운 삼거리에는 문명 학교 옛터 유적비가 있다. 높이 약 150㎝의 유적비는 과거 문명 학교가 있던 곳을 바라다보도록 세워져 있다.

운문 초등학교 유적비를 보고 망향정에 올라가서 운문호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망향정에 걸린 사진들을 바라보니, 푸르도록 시린 호수 아래 그런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잠시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할아버지 한 사람이 손자와 며느리를 데리고 망향정에 올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산 아래가 원래 할아버지 집이었단다. 너희 아빠도 그곳에서 태어났지.” 그러자 손자가 “그런데 왜 물 속에 있어요?”라는 질문하였다. 잠시 말이 없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아이의 어머니가 “여기 댐이 만들어지면서 집이 물속에 잠긴 거야.”라고 설명하였다. 가족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다. 할아버지의 눈은 여전히 운문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운문댐 공사가 시작되다]

운문댐의 건설에 앞서 1981년 12월 22일 정부에서는 금호강 수계 광역 상수도 사업[운문댐 건설] 타당성 조사 및 실시 설계를 착수하였다. 이에 1985년 7월 건설부[지금의 국토 교통부]는 태백권 광산 지역과 대구광역시 주변 도시의 급수난을 완화하기 위해 1985년 9월 중으로 태백권 광역 상수도 사업의 광동댐과 금호강 계통 광역 상수도 사업의 운문댐 건설 공사를 착수하기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운문댐 건설에 앞서 다목적댐 건설에서 용수 위주 중형댐 건설로 계획을 바꾸고 1985년 12월 14일 착공을 시작하였다.

운문댐 건설로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마을과 농지 등 총 8.62㎢가 수몰됨에 따라 1986년 경상북도 지사와 부산 지방 국토 관리청장은 용지 보상 업무 위탁 협약을 체결하고 수몰 마을 주민들에 대한 보상을 시작하였다. 1986년 6월 1일에는 운문댐 건설 지원 전담 기구에 보상·이주 대책계가 설치되면서 1986년 7월 19일에는 보상 업무가 부산 지방 국토 관리청에서 청도군으로 인수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보상을 위하여 1989년 9월 29일 운문댐 보상 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보상과 함께 문화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1991년 11월 30일 코퍼 댐(cofferdam)[하천 공사에서 물이 유입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완공되었고 1991년 12월 1일 본격적인 댐 공사가 착공되었다. 운문댐은 1993년 완공을 목표로 하였지만 보상과 공사 지연 등으로 인하여 1996년 4월 13일 완공되었다. 저수량 1억 3500만 톤의 중규모에 해당하는 운문댐의 완공으로 인하여 대구광역시·영천·경산·금호·하양·진간·압량·용성·남산 등 아홉 개 지역에 1일 36만 톤의 생활용수가 공급되었다. 대구광역시 및 주변 도시는 87%인 상수도 보급률이 96%로 늘고 1인당 급수량도 230ℓ에서 390ℓ로 늘었다. 운문댐은 길이 407m, 높이 55m, 가로 6m, 세로 6m의 수문 두 개를 갖춘 중앙 차수벽형 사력댐이다. 운문댐으로 인해 만수 면적 7.8㎢, 유역 면적은 301.3㎢, 총저수량은 1억 3500만 톤의 운문호가 형성되었다.

운문댐이 건설되면서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행정 구역이 수몰되었다. 운문면 소재지였던 대천리 221호, 순지리 113호, 방음리 63호, 오진리 35호, 서지리 85호, 공암리 74호, 지촌리 66호 총 657가구가 수몰되었다. 수몰 면적은 농경지 3.66㎢를 비롯하여 하천 2.41㎢, 대지 0.3㎢, 기타 지역 2.25㎢의 총 8.62㎢이다. 이때 운문면사무소를 비롯한 농협, 우체국, 보건소, 예비군 중대 등 6개의 관공서가 수몰되었다. 운문 초등학교와 지촌 초등학교, 문명 중학교, 문명 고등학교도 폐교와 함께 수몰되었고, 운곡 정사를 비롯한 전통 건축물 13개소, 지석묘 44기, 노거수 45본, 선사 시대 주거지 2개소, 도요지 1개소, 고분 72기도 함께 수몰되었다.

[1991년 매주 송별회를 열다]

1991년 운문면에서는 매주 송별회가 열렸다. 당시 운문면 일대에서 가장 중심지였던 대천리에는 운문면사무소와 우체국, 보건소를 비롯해 운문 초등학교와 문명 중학교, 문명 고등학교가 있었으며, 지촌리에는 지촌 초등학교가 있었다.

폐교된 운문 초등학교는 1932년 8월 26일 운문 공립 보통학교로 인가받은 후 1946년 운문 국민학교가 되었다. 가구가 250호가 넘은 대천리에 소재한 운문 초등학교는 당시 운문면에서 가장 큰 학교였다. 1969년에는 재학생이 12학급 590명에 이르렀다. 이후 이농 현상에 따른 인구 감소로 인하여 교세가 급격하게 축소되면서 학생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운문댐 건설 확정과 함께 보상이 이루어지면서 학생수는 하루하루 감소하였다. 마지막 1991년 폐교를 앞둔 시점에서는 1학년 5명, 2학년 4명, 3학년 7명, 4학년 3명, 5학년 11명, 6학년 6명 등 3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1992년 2월 19일에는 6명의 학생들이 졸업식을 하였다.

1991년 12월 18일 방영된 SBS 특집 다큐멘터리 「푸른 일기 마지막 수업」에는 매주 이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운문댐으로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인근의 대구나 청도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로 인해 매주 교실에서는 송별회가 개최되었다. 남겨진 아이들 역시 떠날 준비로 바빴다. 1992년 2월 마지막 수업과 함께 치른 졸업식에는 마을 주민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운문면 대천리 808번지에 위치한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의 졸업식은 좀 더 의미가 깊었다. 1966년 설립 인가를 받은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의 역사는 실제로 1906년 문명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학교의 필요성에 신원리김해 김씨, 월성 손씨, 오진리남양 홍씨 가문 등이 중심이 되어 오리와 방음리 등 5개 마을에서 동유 전답을 기부하면서 문명 학교는 1908년 학생 30여 명을 모아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문명 학교는 1966년 2월 1일에 학교 법인 문명 교육 재단 인가를 통해 문명 중학교 6학급, 문명 고등학교 3학급을 인가받아 개교하였다. 1969년 100명의 중학교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해마다 중학교 약 100명, 고등학교 30∼4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운문댐 건설과 함께 폐교가 확정되면서 1991년 문명 중학교가 84명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먼저 폐교되었고, 이후 1993년 고등학생 51명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문명 고등학교가 교정을 떠났다. 이후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는 경상북도 경산시 백천동으로 교정을 이전하였다. 홍영기 이사장은 고향인 운문면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경산시로 교정을 옮겨 2011년까지 운영하였다. 홍영기 이사장은 『내 고향 운문을 용궁에 바치고』라는 책에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과 고향 운문에 대한 애잔함을 표현하였다.

학교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폐교에 대한 아픔은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모교를 잃은 수많은 졸업생들에게도 전해졌다. 운문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학교가 폐교되자 많은 졸업생들이 가슴 아파하였다. 현재 인터넷상의 다음 카페나 네이버 불로그에는 운문 초등학교 동기회, 지촌 초등학교 동기회, 문명 중학교 총동창회 등 모교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나누는 동문회들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보상과 이주 단지 건설]

운문댐 수몰 지구 보상과 이주는 약 6년 동안 진행되었다. 대대로 이어져 온 터전을 잃는 사람들에게 이주는 간단한 이사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터를 옮겨 새 삶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운문댐 수몰 지구에 대한 보상과 이주는 1986년 5월 30일 ‘운문댐 건설 지원에 따른 관련 규칙 공포’에 의거하여 청도군 건설과 주택계에 보상·이주 대책계가 신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보상을 위해서는 ‘청도군 운문댐 보상 심의 위원회’가 1989년 9월 29일 설립되었다. 보상 심의 위원회는 청도 군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총 2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987년 9월 29일 1차 회의를 시작으로 1991년 3월 22일 12회차 회의가 진행되었다. 운문댐에 대한 보상 과정은 수몰 지역에 대한 보상과 간접 피해 보상으로 구분되었으며, 수몰 지역 보상은 1차 보상과 2차 보상으로 단계별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몰 지역의 보상 문제는 이주민 측의 ‘현실 보상’과 정부 당국의 ‘법적 보상’ 차이로 인하여 마찰이 빚어지면서 탄원서와 건의서가 접수되었다. 다음은 1989년 민원실에 접수된 운문댐 보상에 따른 탄원서의 일부이다.

〈이 탄원서를 작성하면서〉

내 고향 운문 땅에 삶의 안착과 부귀를 위해 나의 손발이 터지는 줄 모르고 갈고닦아 놓은 조상들의 정성도 무시한 채 대구직할시민과 경산군민의 식수난 때문에 무서운 물구덩이가 되어야 하는 운명 속에 실향민의 인생살이는 통곡의 눈물바다…(중략)…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서 오직 나의 죽음의 시체만이 저 산 저 봉우리에, 저 산 모퉁이엔 후손의 삶과 생명이 지장 없는 곳이니 고이고이 묻어 달랬던 조상들의 유언도 간곳없고 이 땅 일구어 옥수수 심고 감자 심어 구슬 같은 땀과 더위에 휩싸이면서도 배고픔을 잊어 가던 이곳 운문 땅이었는데…(중략)… 이 지역의 수입성을 분명히 분별하여 애타게 부르짖는 호소, 탄원 간청문에 즈음하여 정부 당국은 실향민의 응용의 대가에 있어야 하는 것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여기 분야별 상황을 열거할까 하오니 탄원 접수기관에 마지막 손길을 수몰민 일동은 엎드려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1989년 8월

운문댐 수몰민 일동 드림

보상 과정에 있어서 선(先) 보상 후(後) 착공이라는 법률에 의하여 보상 대책이 세워짐에 따라 수몰 마을 주민들은 먼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과 토지에 대한 현실적 가격을 보상하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후 운문댐 보상은 1차 보상과 2차 보상에 있어서 보상 기준 가격이 다르게 적용됨에 따라 민원이 발생하고, 1차 보상과 2차 보상의 시간적 간격으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6여 년 동안 지속된 보상 문제를 마무리하고 이주민들은 집단 이주와 자유 이주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이주하였다. 집단 이주는 말 그래도 지역을 설정하고 일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함께 이주를 하는 것이며, 자유 이주는 개개인이 원하는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주하는 것을 이른다. 『운문댐 수몰 지구 지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주민 중 과반수 이상이 자유 이주를 원하였고, 집단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운문면 관내로 이주하기 원하였다.

집단 이주자들의 경우 운문댐 인근 신원리봉하리, 방지리 등으로 이주를 원하였는데, 이는 살아온 생활 환경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 이주였다. 이러한 이주민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 운문댐 입구 운문댐 수질 관리소가 위치한 대천리였다. 이주민들은 집단 이주지로서 운문댐 근처인 운문면 방지리의 상방지 마을로 이주 단지를 건설하였고, 이후 대천리라는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을 떠나지 못한 실향민들이 모여서 마을을 새롭게 조성하고, 운문댐으로 수몰된 대천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 마을 이름을 명명하였다. 대천리의 입구에는 마을 표지석과 함께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실향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겨진 것과 찾아오는 사람들]

운문댐 건설로 일대가 다 수몰되었지만 다행히 남겨진 것들도 있다. 운문댐에서 공암리 방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바라다보이는 공암 풍벽이 있다. 청도 팔경 중 제4경에 속하는 공암 풍벽은 공암리 위 운문호에 자리 잡은 반월형 절벽이다. 과거 용과 학이 무리 지어 사이좋게 놀았다는 학소대가 위치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늦은 봄 공암 풍벽은 진달래가 피어 절경을 이루고, 가을이면 단풍을 이루어 뛰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3월이면 으레 꽃놀이를 즐기는 장소였고, 학생들이 즐겨 찾는 소풍 장소였다. 운문댐을 조성하면서 일부가 잠긴 까닭에 공암리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전경이 되었다.

공암 풍벽을 보기 위해서는 국도 20호선에서 가리봉 산길을 내려가 아래쪽에 위치한 전망대까지 가야 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공암 풍벽 아래에 있는 공암[구멍 뚫린 바위]도 볼 수 있다. 공암은 공암 풍벽 아래 곡천대 용굴에 살던 용이 승천하면서 내리쳐서 생긴 구멍이라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경주와 청도를 잇던 유일한 길목이었고, 소 한 마리가 거뜬히 통과할 정도의 너비였다고 한다. 지금은 운문댐으로 인하여 국도 20호선을 따라서 공암리 버스 정류장을 거쳐 30분 정도 가야만 경주와 청도의 경계선에 이를 수 있다.

선비들이 시류를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곡천대 또한 이름만 남았다. 절벽에서 돌을 던지면 10여 분 동안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는 용굴, 공룡 발자국, 신라 때 장육산에서 여섯 장군이 무술 연마를 할 때 생긴 말발굽 자국도 운문호 아래로 잠겼다.

국도 20호선을 따라 공암리를 나와 대천리로 향하는 길에 운문호 앞으로 튀어나온 개산이 보인다. 개산의 입구에는 창말이라는 곳이 나온다. 지금은 수몰되고 없는 대천리는 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동창천운문천의 큰 물길이 합쳐져 종종 물난리가 나는 곳이었다. 대천리 주민들은 물난리를 피해 곡식과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를 따로 마련해 두었는데 그곳이 바로 창말이다. 창말은 해발 200m에 위치한 곳으로 수몰된 대천리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운문댐으로 인해 대천리가 물속에 잠기고, 창말이 평지가 되었다.

운문댐 수몰 지역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묘소가 있다. 벌초와 성묘를 하기 위해 과거에는 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편히 다녔지만 현재는 배를 타고 건너가거나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청도군에서는 매년 명절이 되면 수몰 지역을 찾는 성묘객들을 위해 선박을 운항하고 있다.

망향정에서 운문댐을 따라 가다 보면 개산과 마주보는 호산을 볼 수 있다. 호산은 ‘범뫼’라고도 하는데,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면서 유래된 이름이다. 국도 20호선을 따라 운문댐 입구까지 가면 운문댐 관리소와 운문댐 하류보 유원지에 다다르고 다시 운문사로 향하는 지방도 69호선을 따라가면 운문교가 나온다. 운문교를 지나 계속 가면 호산이 끝나는 지점에 ‘순지동 1반 호산리 입구 수몰 지구비’라고 새겨진 유허비를 볼 수 있다. 호산리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마을이 수몰된 후 2011년 11월에 세운 비석이다.

대천리에서 운문사 방면으로 가다 운문호를 끼고 돌아서 가면 운곡 정사원모재가 눈에 들어온다. 운곡 정사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1573∼?]의 8대손인 운곡(雲谷) 김몽노(金蒙魯)[1828∼1884]의 생가이다. 김몽노는 만년에 운문면 방음리 서지산 아래 낙화정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지냈는데 낙화정이 낡고 쇠락하여 순지리로 옮겨 오면서 운곡 정사라고 편액을 붙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32호이다. 원모재김응명과 아들 운계(雲溪) 김주(金柱)[1612∼1678]를 모시는 재실이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67년 중수를 하였다. 운곡 정사와 함께 1993년 순지리 484-1번지에서 현 위치인 순지리 342-2번지로 이건하였다.

운문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문화 유적 중에는 운곡 정사처럼 운문댐 주변으로 이건된 유적도 있지만 멀리 다른 지역으로 옮긴 유적도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 단지의 신라 밀레니엄 파크에는 순지리에서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숙지헌이 이건되어 있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청도군 운문면의 수몰 마을이 고향인 시조 시인 김술곤은 2011년에 발간한 자신의 첫 시조집 『수몰 저쪽』을 통해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시조로 표현하였다. 다음은 시조집에 실린 「수몰 저쪽」이라는 시조이다.

반시감 붉게 익어 마을 한 폭 놀빛이던/ 그때 그 감나무들 운문댐에 다 잠긴 후/ 더러는 수돗물에서 감잎차 맛이 난다// 종 댕댕 귀에 쟁쟁 초등학교 조무래기/ 물이랑 지우개가 흔적 없이 지워 놓고/ 감감한 물칠판 위에 청둥오리 떠 있다// 서울서 전학해온 얼굴 하얀 소녀 위해/ 오른팔 저리도록 물수제비 떴던 나는/ 여지껏 상류 저쪽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초록빛 감잎바람 풍금소리 실어 올 때/ 몰랐네 난 몰랐네 목이 마른 이유를/ 이제는 덥석 손잡아 줄 옛집 없는 아픔이// 다슬기 눈을 뜨는 모천의 댐 수위를/ 절반은 마음속에 낮춰가며 살아야겠다/ 야무진 조약돌 하나 그냥 품에 안은 채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라는 속담이 있다. 제 고향이나 제 집을 떠나 낯선 고장에 가면 자연 천대를 받기 쉬우며 고생이 심하고 외롭다는 말이다. 고향이 가지는 안정감 그리고 그것을 상실하였을 때 오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대변하는 말이다. 수몰 마을 주민들도 이 고향을 잃어버렸다. 이는 단순히 공간적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의 내게 형성된 세계가 상실된 것이며, 나라는 개인이 형성된 이 복합적 심성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고향에 내재된 다양한 의미를 생각한다면 고향은 눈에서 사라진다고 하여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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