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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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여수경 |
[내호리, 유호리보다 유천으로 불리는 마을]
청도군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밀양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내호리는 일찍이 교통이 발달하였다. 마을 앞쪽으로 흐르는 동창천과 청도천이 만나 하천이 급격히 넓어지는 내호리는 일찍이 유천역과 밀양으로 향하는 도로, 하천의 발달 등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평야도 비옥하게 발달한 분지형 마을이며, 골짜기 안에 자리하고, 하천가에 있어 ‘내호리’라 불린다. 내호리 옆에 동창천과 청도천이 합류되는 평탄한 지점이자, 내호리와는 노루목 고개를 등지고 있는 곳은 ‘유호리’이다. 내호리와 유호리 모두 하천이 만들어 낸 비옥한 평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하지만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생가지나 근현대 건물이 교차하는 이곳 어디에도 ‘유호리’나 ‘내호리’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유천 우체국, 유천 초등학교, 유천 농업사 등 사람들은 이곳을 ‘유천’이라 부른다. “유호, 내호, 사촌 등 주변 11개 동네를 다 합쳐서 통칭하여 유촌이라고 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유천장이 서는 이곳을 유촌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행정 구역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이곳에 느릅나무가 우거지고 강이 있어 유천(楡川)이라 부른다.
[유천역과 함께 교통의 요지]
유천은 일찍이 역원이 존재하였다. 밀양에서 대구와 한양을 통하는 영남 대로의 관문이며, 고려 시대부터 역로가 통하여 역원이 설치되었던 곳이 바로 유천이다. 영남 대로를 따라 밀양에서 유천으로 넘어오면 사람들은 두 갈림길에 이르게 된다. 동창천과 청도천이 만들어 낸 두 갈림길은 하나는 산서 방면[청도읍 방면]이고, 다른 하나는 산동 방면[매전면 방면]으로 갈라진다. 산서 방면과 산동 방면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 자리 잡은 유천은 이것만으로도 교통의 요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경부선 철도, 중앙 고속 도로, 국도 25호선, 국도 58호선이 만나서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곳 유천이다.
1905년 일제 강점기의 경부선 철도에 유천역이 있었던 것 또한 유천의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일제 시기에는 철도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죠. 모든 화물은 철도로 운반하게 되는데 유천역이 그런 역할을 했어요. 대구에서 우편을 실어서 이곳에 도달하면 다시 청도읍 방면과 매전면 방면 그리고 밀양 방면으로 수송합니다. 지금처럼 도로가 건설되기 전 이곳에서 물자가 모두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고 보면 되요.”라고 이도기[87세]는 전한다.
유천이 교통의 요지였던 사실은 1910년부터 1940년까지 약 30년 동안 이곳에서 성행하였던 양조장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1920년경 유천 주변에 내호, 한재, 원동, 지전, 매화, 금산 등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여섯 개의 양조장이 성업하였다. 이외 1920년경에는 종업원 40여 명과 우차(牛車) 인부 10여 명을 거느린 유천 곡자 주식회사가 유천 교회 서편에 설립되었다. 누룩의 원료인 밀을 당시 북한 지역의 사리원에서 구매하고 기차를 통하여 유천역으로 옮긴 뒤 반 정도 갈아서 반죽한다. 그리고 두께 3㎝, 반경 30㎝ 원형으로 만든 반죽을 발효시켜 다시 유천역을 통하여 탁조 양조장으로 할당하는 회사가 유천에 위치하였다. 이렇게 만든 누룩은 기차를 통하여 전국으로 보급됨과 동시에 우차를 통하여 주변 허가를 받은 양조장으로 옮겨졌다. 말 그대로 유천역은 사람과 함께 물자가 모여서 이동하는 주요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2000년 초반까지 경부선 철로는 신도 마을을 지나 유호리를 거쳐 밀양 여수동 쪽으로 연결되는 곡선 주로였던 곳에 자리한 역사였지만, 지금은 직선화되면서 이름이 바뀌고 역은 이설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유천역에 탄환 폭발 사고로 역사가 모두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52년 1월 3일 6·25 전쟁 중 석탄 생산을 위해 개조된 목탄 기관차가 유호 철교를 지나가던 중 추진력이 약해 유천역으로 후진하였다. 이때 탄환을 수송 중인 군용차가 역으로 들어오면서 정면충돌한 것이다. 새벽 5시경 어두운 상태에서 양쪽의 기차를 발견하지 못하여 서로 정면충돌하게 되고, 탄환이 연쇄 폭발되면서 주변으로 화재가 번져 나가 인근 주민들까지 피난을 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역사가 모두 전소되고 역무원 수명이 사상되었다.
1956년에 신 역사를 다시 준공하였지만, 이후 오례산 기슭 반원형 철길이 폐쇄되고 직선화되면서 2000년 ‘유천역’이란 이름은 사라지고 상동역으로 역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직선화되면서 이설된 과거 유천역의 역사와 플랫폼에는 민가가 들어서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유천역에 대한 기억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번성한 유천 시장, 줄을 서서 봤던 유천 극장]
유천은 교통의 요지 이외도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청도 지역에 전파될 때 첫발을 닿은 곳, 3·1 운동과 항일 운동이 활발하였던 곳, 주변 일대 유일하게 극장이 있던 곳, 우시장도 들어섰던 유천 시장이 있던 곳 등, 유천이라는 지명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채롭다.
2일과 5일에 5일장으로 열렸던 유천장은 청도와 밀양의 상권 중심지였다. 밀양장보다, 청도장보다도 규모가 컸던 유천장에 대한 기억은 주민들에게 아직도 생생하다. “크다마다요. 우시장이 이 위에 있을 정도로 큰 장이었어요. 이곳에 없는 것이 없었어요. 지금은 시장이 안 서지만 이전에는 장만 들어섰다고 하면 저 유천역에서 매전면에서 버스 타고 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이 이곳이었지요. 그래서 극장도 생겼잖아요.”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유천 시장의 규모는 현재 유천 시장의 흔적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언뜻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밀양 방면에서 유천에 들어서고자 동창천을 넘어설 때 마을이 시작되는 입구에서부터 벌써 유천의 상권은 시작된다. 대장간에서 이발소, 방앗간이 자리 잡은 입구에서부터 다리를 건너 유천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마을의 공터에까지 약 100여 미터를 넘어서 모두 상권을 이루고 있는 점을 보아, 과거 유천장의 상권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유천 극장, 영신 정미소, 구생당 한약방, 중앙 소리사 등은 과거 이곳에서 번성을 누렸던 상인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사람들의 소리는 사라졌지만 건물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풍각면에서 철가방 극장을 운영하는 개그맨 전유성이 탐을 냈다고 하는 유천 극장은 외관은 허물어지고 굳게 문을 닫고 있지만 과거의 위용을 자랑한다. 이호우 생가 맞은편에 위치한 유천 극장은 1970년대 개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천 극장 맞은편에서 약 50년 동안 중앙 소리사를 경영하는 주민은 “극장이 1970년대 즈음 들어섰을 거야. 그때는 대단했지. 매전면 동곡에서 저 밀양에서도 이곳에 극장 구경을 하러 왔으니까. 장날이 되면 극장을 한번 가는 것이 일과였고, 돈이 없는 학생들은 극장에 들어가고 싶어서 기웃기웃하던 곳이야.”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얼마 전 아이들이 극장 안에서 놀다가 불이 나서 극장이 전소될 위험을 겪은 뒤로는 굳게 문이 닫혔지만 외관만으로도 당시 번성하였던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듯하다. “당시 유천 극장이 청도읍 청도 극장, 중앙 극장과 어깨를 견주며 영화관을 돌릴 때는 200여 명이 입장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단체 관람이 많았다.”라며 유천 극장이 문을 닫기까지 영사 기사로 일하였던 이지춘[64세, 내호리]은 기억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그 명성을 이어갈 듯 보였던 유천 극장은 텔레비전 보급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만나 점점 쇠퇴하였다고 한다. “사장이 텔레비전을 생각하지 못한 거야. 당시 텔레비전은 어마어마한 가격이잖아. 아무나 살 수가 있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극장에서 본 것인데. 생각하지 못했지. 텔레비전이 그렇게 빨리 보급될 것인지를…….” 중앙 소리사 사장은 극장이 문을 닫게 된 배경에는 텔레비전의 보급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손님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극장은 1990년대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물들]
유천의 건물들에는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토담과 여닫이 나무문이 달린 정미소, 돌과 콘크리트 그리고 판자를 덧대어 만든 극장 건물, 양조장을 개조한 사료 판매소, 지붕에 간판을 붙인 철공소, 1970년대 금성 텔레비전과 라디오 수리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중앙 소리사, 돌로 만든 독특한 건물의 구생당 약국, 일제 강점기 때의 가옥들을 개조한 수련 다방 등이 유천 시장에 일렬로 위치하고 있다. 마치 1960년대 과거를 보여 주는 듯하지만 사람이 없어 시간이 멈춰버린 건물만 남아 있는 곳이 유천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락과 등겨 먼지를 날리며 돌아가는 영신 정미소를 보면 과거 이 거리에서 활기차게 움직였을 듯한 건물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미소 주인 김말순[60세]은 “유천에선 거의 유일하게 돌아가는 방앗간이여. 한 80년은 됐다고 혀. 방앗간에 먼지가 돌아야 우리가 먹고 살아.”라며 사람 좋게 웃는다. 영신 정미소는 유천 시장통에서 유일하게 활발하게 돌아가는 곳이다. 중앙의 입구 기둥에 적혀 있는 주문량과 금액에서 정미소가 번성하였을 당시 시간이 없어 기둥에 적었을 직원들의 비명이 절로 느껴질 정도이다. 1980년대 수매 곡식에 대한 정부 공식 가격표 또한 건물과 함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유천 극장 맞은편에는 중앙 소리사가 있는데, 흰색 간판에는 크게 ‘중앙 소리사’라고 적혀 있다. 중앙 소리사를 운영하는 80세의 김 옹은 1960년대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살던 집을 개조하여 가게를 만들었다. 살던 집에 앞쪽으로 기계를 수리할 수 있는 책상과 그리고 부품을 파는 전시대를 마련하고 크게 중앙 소리사 간판을 달았다.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두꺼운 기계 수리서와 치우지 못한 부품 전시대는 아련함마저 느끼게 한다. “텔레비전과 오디오 등을 많이 고치러 왔어. 여기가 큰 장이 들어서니까 그런 것을 고치러 많이 오지. 텔레비전은 출장 수리도 해 줬지. 그래도 좀 했는데, 기술이 자꾸 발달하니 따라갈 수가 없어. 그래서 그만뒀어. 이것은[부품 판매대] 얼마 전까지도 부품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놔두었는데 지금은 치우지 못하고 놔두는 거지.” 직접 중앙 소리사라는 이름을 만들었다고 하는 김 옹은 아직도 그 간판과 판매대 그리고 수리대와 책을 보관하고 있다.
중앙 소리사 건너편이자, 유천 극장 옆에는 있는 흰색 바탕에 세로로 쓴 사료 판매소라 적힌 건물은 과거 양조장으로 사용되었다. 붉은색으로 벽채를 칠한 이곳에서는 이 일대 유명하였던 유천 소주를 제조하였다. 유천은 일찍이 역관을 중심으로 주로 관청에 공급하였던 유천 소주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동창천과 청도천 두 하천이 만나는 이곳은 운문댐이 생기기 전에는 동창천의 맑은 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에 1915년경에는 유천 주위로 양조장이 여섯 개나 위치하였다. 여섯 곳의 막걸리 공장과 더불어 유천 소주 공장에서는 하루 100말을 생산하여 유천역을 중심으로 판매하였다고 한다. 유천 소주는 빛깔이 맑아 찬물처럼 무색이고, 화근 내가 나는 듯한 미묘한 향기와 높은 도수에도 뒤탈이 없는 순수 곡주로 유명하였으며, 유천 마을 사람들은 집에서도 암암리에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 인기를 대신하듯 전국 최대의 곡자[누룩] 공장이 유천에 있었고, 유천역을 통하여 전국으로 판매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