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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015
한자 朴虎
이칭/별칭 경인,일청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2년연표보기 - 박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6년 - 박호 식년 문과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79년연표보기 - 박호 사망
출생지 박호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지도보기
묘소|단소 박호 묘소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훈령산
사당|배향지 지산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 군수

[정의]

조선 전기 청도 출신의 문신.

[개설]

박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546년(명종 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과 평해 군수(平海郡守)를 지냈다. 평해 군수 시절 친구가 중국에서 가져온 감나무를 얻어 고향에 가져와 재래종에 접을 붙였는데, 감이 씨가 없고 커서 ‘새월 반시’라 불렀다. 이 감이 오늘날 청도 전역으로 퍼져 청도의 명산물인 ‘청도 반시’가 되었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인(景仁), 호는 일청재(逸淸齋). 밀직부사 박양언(朴良彦)의 후손으로, 두촌 박양무(朴揚茂)의 5세손이다. 생원 박중문(朴仲文)의 둘째아들이며 농암 박란(朴鸞)이 사촌 형이다. 아내는 안동 부사 조세영(趙世英)의 딸로서 풍양 조씨(豊壤趙氏)이다.

[활동 사항]

박호(朴虎)[1512∼1579]는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과 평해 군수를 지냈다. 평해 군수 시절 사신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중국에서 가져온 감나무의 접수(接穗)를 얻었다. 이를 고향에 가져와 재래종에 접을 붙여 세 그루를 심었는데, 씨가 없는 큰 감이 달려 고향 이름인 ‘새월[新月]’을 따서 ‘새월 반시’라 하였다. 이 감이 점차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일대와 청도군 각남면으로 퍼지다가 청도 전역으로 퍼져서 오늘날의 ‘청도 반시(淸道盤枾)’가 되었다. 그때 심은 ‘새월 반시’의 시조(始祖) 한 그루가 청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을사사화 이후 외척 세력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중앙 정국이 여전히 불안하게 돌아가자 평해 군수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왔다. 당세(當世)에 명망 있는 목민관을 보내지 않으려고 수백 명의 부녀자들이 치마를 펼쳐 길을 막아 며칠을 임지에서 떠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그가 떠나자 청렴한 치적에 감사한 군민들이 놋수저를 모아 선정비를 세워 그 덕을 숭앙하였다 한다. 비명에는 “촉군(蜀郡)의 문왕(文王)이 잘 다스리니 무성(武城) 사람들이 거문고를 타는구나. 바닷가의 한 고을이 이미 편안하니 한 자[一尺]의 유비(鍮碑)가 천년을 가리라.”라고 새겼다.

귀향 후 내직의 소명을 받았으나 고향인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에 신안 정사(新安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은거하였다. 박호가 죽었을 때 부음을 들은 평해 군민들이 그 고장의 흙을 도포 자락에 담아 수백 리 먼 길을 달려와 통곡하며 봉분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묘소가 왕릉과 같이 크고 높다. 박호를 위해 세운 선정비인 놋쇠비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로 강제 징집을 당하자, 평해 군민들이 다시 뜻을 모아 향교 태화루(太和樓) 앞에 큰 돌비를 세워 지금까지 추앙하고 있다.

[묘소]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훈령산에 있고, 노포(老圃) 송병기(宋秉夔)가 찬한 묘갈이 있다.

[상훈과 추모]

사림의 모범으로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지산 서원(芝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대사간 강태중(姜泰重)이 찬한 상향축문(常享祝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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