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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993
한자 金履喬
이칭/별칭 공세,죽리,문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4년연표보기 - 김이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89년 - 김이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98년연표보기 - 김이교 청도 군수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99년 - 김이교 홍문관 교리로 전배
활동 시기/일시 1800년 - 김이교 함경도 명천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806년 - 김이교 부사과 직첩 환수
활동 시기/일시 1810년 - 김이교 조선 통신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831년 - 김이교 우의정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32년연표보기 - 김이교 사망
유배|이배지 김이교 유배지 - 함경북도 명천군
사당|배향지 인릉 -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의 1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우의정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김이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으나, 정조가 죽자 벽파에 의하여 유배되었다. 1806년(순조 6) 직첩을 환수 받은 뒤 다시 관직에 나아가 이조 판서·평안도 관찰사·병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예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고, 1831년 우의정이 되었다.

[가계]

본관은 신안동(新安東).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아버지는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이며, 이조 판서를 지낸 김영순(金英淳)이 아들이다.

[활동 상황]

김이교(金履喬)[1764∼1832]는 1787년(정조 11) 사마시 진사과에 장원하였고,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수찬·초계문신(抄啓文臣) 등을 거쳐 1798년(정조 22) 1월 청도 군수로 도임하였다. 1799년 12월 홍문관 교리로 전배되었으며, 1800년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1800년 6월 순조가 즉위한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시파로서 함경도 명천에 유배되었으며 동생 김이재(金履載)는 전라도 고금도에 안치되었다.

1806년(순조 6) 부사과(副司果) 직첩을 환수 받은 뒤 동부승지·이조 참의·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810년 10월 통신사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호조 판서 심상규(沈象圭)를 탄핵하다 교체되었다. 그러나 1810년 12월 16일 다시 통신사로 재임명되어, 1811년 부사 이면구(李勉求)와 대마도 부중(對馬島府中) 객관에서 동무상사(東武上使) 미나모토[源忠岡]와 부사 후지야스[藤安薰]에게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듬해에도 대마도로 건너가 국서를 전달하였다.

그 뒤 성균관 대사성·사헌부 대사헌·도승지·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이조 판서·평안도 관찰사·병조 판서·형조 판서·공조 판서·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 우의정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에 『죽리집』이 있다.

[상훈과 추모]

순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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