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96
한자 城郭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집필자 박승규

[정의]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는 흙이나 돌로 축조된 전통 시대 방어 시설.

[개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 있다. 성곽은 축성 재료에 따라 토성, 석성, 목책으로 구분하거나, 성의 축성된 위치에 따라 산성과 읍성[평지성]으로 나누기도 한다. 성곽은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 대체로 2세기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의 성곽은 처음에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석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성곽은 석성에 의한 산성이 주를 이루는데,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부근에 테를 두른 듯 한 테뫼형과 골짜기를 둘러싸는 포곡형이 주류를 이룬다. 성의 주요 시설로는 성문과 성벽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수구와 문루, 장대, 군창 등으로 구성된다.

청도 지역에도 우리나라의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양상과 같이 토성과 산성이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 축성된 청도 읍성이 남아 있다.

[청도 지역 성곽의 종류]

청도 지역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성곽이 남아 있다. 시기적으로는 고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고 있고, 위치상 야트막한 구릉에 만들어진 토성과 높은 산봉우리에 자리한 산성이 있다. 기능적으로는 단순한 방어 시설로 사용되었던 산성과 고대 이서국의 왕성지로 알려진 토성, 조선 시대의 지방 정치 중심지인 청도 읍성 등 다양하다.

1. 토성

청도의 토성은 백곡토성[백곡산성]과 주구산성이 대표적이다.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바가 없어 정확한 구조와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들 토성은 대체로 3∼4세기경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역사 기록에 전해오는 이서국의 왕성지 또는 군대 주둔지로 추정되고 있다.

백곡토성은 학계에 백곡산성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토루의 흔적으로 보아 토성으로 추정된다. 백곡토성은 고대 이서국의 왕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토성지에서 채집되는 신라 토기의 존재로 보아 6세기까지 계속해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곡토성청도군 화양읍 토평 2리 백곡 마을을 감싸고 있는 해발 100∼120m의 구릉 남쪽 부분에 만들어져 있다. 토루는 길이 200여m에 이르고 높이 1∼3m, 폭 2∼3m를 이루기도 하나 대부분 경작에 의해 삭평되거나 밭둑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서산성 또는 폐성으로 불리어지는 주구산성도 토루가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토성으로 추정된다. 성지 내부에서는 4세기대의 토기 조각을 비롯하여 고려 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도 다수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서국 시기에 축조된 이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산성

청도 지역에는 여러 곳에 산성이 분포하고 있는데, 축조 시기는 삼국 시대로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삼국 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는 오례산성운문산성이 대표적이며, 나머지의 산성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의 의병 활동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오례산성은 일명 오혜산성(烏惠山城), 구도산성(仇刀山城)이라 불렀으며, 삼국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발 500∼626m의 능선 상에 있는 석성으로, 서북쪽이 천험의 절벽이고 동남쪽은 높이 약 2m의 석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체 둘레가 약 4㎞에 이른다. 성벽은 남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동벽·서벽·북벽은 일부 구간이 남아 있기는 하나 대체로 무너져 내렸다.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 내에서는 서문지와 추정 남문지, 봉수대, 망루, 샘 등이 남아 있다. 서문지의 문지석을 제외하고는 그 형태가 뚜렷하지 않다. 오례산성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이서국의 3성[현]의 하나로서 이서국의 중심 세력의 거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운문산성[호거산성, 지룡산성]도 삼국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후백제 견훤의 탄생과 관련한 지룡의 전설이 전해오는 곳으로서 견훤이 신라 침공 때 이 성을 기지로 삼았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3. 읍성

청도 지역의 읍성으로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인 청도 읍성화양읍 교촌리에 지금도 남아 있다. 청도 읍성은 평면이 사각형 형태로서 규모를 살피기에는 너무 훼손되어 있어 잘 알 수 없지만, 조선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성벽은 길이 1,570보[약 1.9㎞], 높이 5척 5촌[약 1.65m]이었다고 한다.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성벽은 동문지(東門址) 부근으로 성벽의 기초부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높이는 대략 1m 정도이고 길이는 10m 정도이다.

성곽의 축조 연대는 1590년(선조 23)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에 완공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동문·서문·북문이 소실되는 등 크게 파손되었다고 한다. 그 뒤 소실된 문루를 다시 세우고 성벽을 보수하여 조선 말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 강점기에 모두 헐어 버려 그 흔적만 전해지고 있다. 최근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동벽과 북문 및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 등 조선 시대 문헌에 의하면, 이 성곽 안에는 동헌, 객사, 근민당(勤民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기고청(旗鼓廳), 군사(郡司), 인리청(人吏廳),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고마청(雇馬廳), 사창(司倉)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객사로 사용되던 도주관(道州館)과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된 동헌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