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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58
한자 南山溪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681일대
집필자 최인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남산 계곡 새김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681번지 일대지도보기
현 소재지 남산 계곡 새김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산34-1지도보기
성격 새김글
양식 음각
관련 인물 김종석|도필락|도우엽|도필호|도필중|김만응|김중려|이관용|이기환|김학련|하두은|김극철|김윤하|손종진|최익주|정하언
소유자 청도군
관리자 청도군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남산 계곡에 있는 새김글.

[개설]

화양읍 동천리교촌리에 걸쳐 있는 약 1.5㎞ 정도의 남산 계곡은 절경으로 이름이 높아 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남산 계곡의 절경에 감탄하여 계곡의 굽이마다 바위에 글을 새겼다. 새겨진 글은 계곡의 특징을 적은 새김글 13[또는 16개라고도 함]개와 11편의 시이다.

『문화 유적 분포 지도』에서는 1곡부터 13곡까지청수대(靑水臺), 녹수문(鹿脩門), 음용지(飮龍池), 백석뢰(白石賴), 질양석(叱羊石), 운금천(雲錦川), 취암(醉巖), 철주단(撤珠湍), 산수정(山水亭), 만옥대(萬玉臺), 유하담(流霞潭), 낙석대(落石臺), 금사계(金沙界)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정비된 안내판에는 음용지, 백석뢰, 운금천, 취암, 질양석, 만옥대, 연주단(聯珠湍), 석문(石門), 산수정, 유하담, 일감당(一鑑塘), 용항(龍亢), 옥정암(玉井巖), 낙안봉(落雁峯), 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 금사계(金沙界) 등 16개를 언급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한편 청도군과 한빛 문화재 연구원에서 펴낸 『청도의 금석문』에서는 화산동문(華山洞門), 음용지, 취암, 백석뢰, 운금천, 질양석, 용항, 낙안봉, 금사계, 산수정, 자시유인불상래를 들고 있다.

[건립 경위]

청도 남산 계곡의 새김글은 남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굽이마다 상응하는 글을 새겨 넣었는데 일부를 제외하면 유래를 알 수 없다. 다만 취암은 일취(一醉) 도필락(都必洛)의 호인 일취에서 취암을 따 왔고, 취암 아랫부분에 시(詩)를 짓고 새기게 된 내력은 이관용(李觀瑢)이 적어 놓은 글에서 볼 수 있다.

산수정은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1851∼?]가 창건한 정자로 청도의 인사들이 산수계(山水契)를 만들어 사계절 이곳에서 시를 짓고 읊은 데서 유래한다.

옥정암은 옥정암 아래 있는 “임술정미중위이대방서(壬戌鄭美仲爲李大防書)[임술에 정미중이 이대방을 위해 쓰다.]”라는 새김글을 통해 영조 때 서예가인 정하언(鄭夏彦)[1702∼1769]이 경상도 도사로 재직할 때인 1742년에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위치]

청도의 대표적인 관광지의 하나로 화양읍사무소에서 동천리를 지나 교촌리 화강지에 이르면 남산 계곡 입구이다. 새김글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새겨져 있다.

[형태]

남산 계곡 굽이마다 바위 및 절벽에 해서, 행서, 초서를 음각하였다. 새김글의 내용은 주변 경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거나 문인들이 지은 시를 새겨 넣었다.

『청도의 금석문』에 따르면 화산동문은 화산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글자의 크기는 50㎝ 정도이고, 초서체이다. 이 새김글에서 60㎝ 정도 떨어진 곳에 김종석(金宗碩)이라는 성명이 새겨져 있다.

음용지는 계곡 암반 위의 큰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데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 하며, 기우단이라 하기도 한다. 글씨는 초서체로 30×80㎝ 크기이다.

취암은 운금천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취암의 이름은 도필락의 호인 일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취암 주변 큰 바위 4곳에는 모두 11수의 한시가 음각되어 있다. 취암을 새긴 바위에는 도광(道光) 18년 무술(戊戌)이라는 연대가 표기되어 있어 1838년(헌종 4)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체는 행서이고, 글자의 크기는 35×25㎝이다. 한시는 도필락이 취암이라는 제목으로 읊은 것을 필두로 10여 명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읊었다. 그 사람들은 도필락의 아들인 도우엽(都宇曄), 김만응(金萬應), 김중여(金重呂), 이관용, 이기환(李基煥), 김학련(金學鍊), 하두은(河斗銀), 김극철(金克喆), 김윤하(金允河), 손종진(孫鐘震) 등이다. 이 외에 시는 없지만 도필락의 형제로 보이는 도필호(都必鎬), 도필중(都必重)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취암 바위의 아랫부분에 시(詩)를 짓고 새기게 된 내력을 이관용이 적어 놓았는데 일취옹(一醉翁) 도필락이 시와 술로 정을 토로하여 친구들과 함께 문주회(文酒會)를 열고 이곳에서 술잔을 띄워 놓고 시를 읊었고, 아들인 도우엽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돌에다 시를 새겼다고 한다.

백석뢰는 흰 돌이 펼쳐진 여울이라는 뜻으로 행초서로 음각되었고, 글씨의 크기는 130×35㎝이다.

운금천은 물이 구름 흐르듯,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는 뜻이다. 행서로 음각하였는데 글씨 크기는 75×33㎝이다.

질양석은 염소나 양을 부르기에 알맞다는 의미로 음각되었다. 글씨는 해서로 50×120㎝이다.

연주단은 물방울이 구슬을 꿰듯이 흐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글씨는 초서로 음각되었으며, 크기는 30×80㎝이다.

석문은 계곡의 형태가 대문과 같은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글씨는 행초서로 음각되었다.

만옥대는 계곡의 수직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빗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음각된 초서로 크기는 30×120㎝이다.

일감당은 거울 같이 맑은 연못이란 뜻이다. 글씨는 초서로 음각되었는데, 크기는 100×35㎝이다.

유하담은 물웅덩이에 일렁이는 물결에 비친 햇살이 금빛 노을과 같다는 뜻이다. 글씨는 초서로 음각되었으며, 크기는 30×80㎝이다.

옥정암은 옥 같은 맑은 우물이 있는 바위라는 뜻이다. 일감당 오른쪽 위 바위 높은 곳에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는 행초서로 크기는 150×70㎝이다. 옥정암 아랫부분에 “임술 정미중 위 이대방 서”라는 새김글을 통해 정하언이 1742년에 적은 것을 알 수 있어 금석학적 가치가 상당히 높다.

용항은 용의 목구멍이란 뜻으로 일감당 맞은편 물웅덩이 왼쪽 바위에 행서로 음각되어 있다.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추정된다. 글씨의 크기는 30×80㎝이다.

낙안봉은 큰 절벽으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바위들로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상을 표현하였다. 초서로 음각되었으며, 글씨 크기는 30×80㎝이다.

금사계는 금모래가 펼쳐진 세계란 뜻으로 관세음보살의 주처(住處)를 상징한다. 금사계 위쪽이 신둔사(新芚寺) 경내임을 상징한 것이다. 해서로 음각되었으며, 글씨 크기는 40×125㎝이다.

산수정은 청도의 유림인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1851∼?]가 건립한 정자로 고을의 인사들이 산수계(山水契)를 만들어 사계절 이곳에서 시를 짓고 읊었다고 한다. 이곳을 시정(詩亭)골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산수정이 퇴락하자 1962년 목재와 기와를 화강지 언덕으로 옮겨 화악루(華岳樓)를 지었다. 해서로 음각되었으며, 글씨 크기는 18×70㎝이다.

자시유인불상래는 주희(朱熹)의 「무이도가(武夷棹歌)」 중 제8수의 마지막 부분 “막언차처무가경 자시유인불상래(莫言此處無佳境 自是遊人不上來)[이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없어 유람객이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지 마오.]”를 취한 것으로 계속해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음을 말한 것이다. 초서로 음각되었는데 글씨의 크기는 53×114㎝이다.

[현황]

남산 계곡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고, 새김글을 설명하는 표지판을 세워 잘 관리되고 있어 보존 상태가 좋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의 대표적 명승지인 남산 계곡의 절경을 잘 표현하고 있고, 문인들의 교유와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옥정암의 경우는 조선 영조 때의 서예가인 정하언의 글씨를 새긴 것이고, 산수정은 소강 최익주가 창건한 정자로 청도의 인사들이 산수계를 만들어 활동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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