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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리 선사 유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649
한자 沙村里先史遺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사촌리 461-1번지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김구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9년 3월 7일연표보기 - 사촌리 선사 유적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발굴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9년 4월 8일연표보기 - 사촌리 선사 유적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발굴 종료
현 소재지 사촌리 선사 유적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사촌리 461-1번지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 경주 박물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76
성격 생활 유적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사촌리에 있는 선사 시대의 생활 유적.

[개설]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 실시한 정밀 지표 조사로 확인된 선사 시대 생활 유적지로서, 1989년 발굴 조사를 통해 민무늬 토기가 사용된 시기의 생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간 돌검을 비롯한 선사 시대 유물 다수가 출토되었다. 일부 유물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위치]

사촌리 선사 유적은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사촌리 461-1번지로 동경 128°47′44″, 북위 35°34′23″에 해당한다. 동창천청도천이 합수하여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을 이루는 청도읍 유호리에서 동북 방향으로 직선거리 2㎞ 지점에 있다. 유호교 북단에서 동창천과 나란히 뻗어 있는 지방도 제919호선을 따라 동곡 방향으로 2.3㎞ 진행하면 도로 좌측에 접해 있는 해발 68.4m의 ‘똥뫼산’이라는 독립 구릉이 나타난다. 이 야산의 등성마루에 해당하는 해발 65m∼68m 선상의 완만한 평탄지가 사촌리 선사 유적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국립 경주 박물관에서는 경상북도 일원에서도 비교적 문화 유적의 조사가 미흡했던 청도군의 고고 분야 및 불적에 대한 정밀 지표 조사를 계획하고, 1987년과 1988년 2차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였다. 사촌리 선사 유적은 1988년 동창천 수계에 있는 산동 지방을 대상으로 한 2차 조사 때 발견되었다.

당시 사촌동 마을앞 독립 구릉의 정상부 근처 70㎡ 범위에서 홈자귀[有溝石斧] 2점, 숫돌 1점, 민무늬 토기[無文 土器] 다수를 수습한 조사단은 청도군 지역 내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민무늬 토기 생활 유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1989년 3월 7일부터 4월 8일까지 33일간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현황]

발굴 조사를 실시한 정상부의 토층 양상을 보면, 표토 아래에 10∼20㎝ 두께의 암갈색 사질 점토층이, 다시 그 아래에는 비교적 굵은 모래가 섞인 약 20㎝ 두께의 적갈색 사질 점토층이 풍화 암반인 석비레 생토층 위에 퇴적되어 있다. 그러나 북동사면과 북사면은 표토 아래 바로 적갈색 사질 점토층이 나타나는데, 이는 급한 경사로 인해 토양의 유실이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물은 주로 표토층과 암갈색 사질 점토층에서 출토되었다. 간 돌검[磨製石劍], 돌화살촉[石鏃], 돌낫[石鎌], 홈자귀[有溝石斧], 조갯날 도끼[蛤刃 石斧], 대팻날[片刃 石斧], 돌끌[石鑿], 반달칼[半月形 石刀], 숫돌[砥石], 1차 가공 석기[打製石器] 등의 석기류와 점토띠 토기[粘土帶土器], 두형 토기[豆形 土器], 쇠뿔잡이 손잡이 긴 목항아리[組合式 牛角形 把手附壺] 등의 민무늬 토기, 그리고 그물추[漁網錐], 가락바퀴(紡錘車) 등의 토제품이 있다. 이밖에 시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신석기 시대에 유행한 고리 모양 귀걸이(玦狀耳飾)인 장식옥 1점과 통일 신라 시대의 뼈 단지[骨壺 ] 2점이 있다.

그리고 발굴 구역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자연석 무리들은 인간에 의해 옮겨진 것들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었다.

최근 난개발로 인해 똥뫼산자체가 아예 사라지고 구릉 말단부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이며, 자연 지형이 삭평된 경계선 여기저기에 민무늬 토기 조각과 삼국 시대 덧널무덤 유물인 도질 토기 파편들이 눈에 띈다.

[의의와 평가]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초기 철기 시대의 토기류와 석기류 등의 출토 유물을 통해 당시 생업 경제와 문화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다량으로 출토된 어망추와 농경구는 생업 경제가 유적의 주변 자연 환경과 일치하는 어로와 농업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준다. 그리고 정상부의 서남쪽 발굴구에서 겹쳐 출토된 8점의 석기 무리는 일괄 유물로서 가치가 클 뿐 아니라, 다른 유적의 출토 유물에 대한 비교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이다.

발굴 조사가 정상부 근처 일부 면적에 국한된 관계로 주거지 등이 확인되지 않았을 뿐, 구릉 전체에 걸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다면 신석기 시대 이래 좋은 유구들이 많이 드러났을 중요한 유적이었다. 그러나 매장 문화재와 관련하여 어떠한 조처도 없이 유적은 인멸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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