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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청도 지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82
한자 新幹會淸道支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8년 5월 12일연표보기 - 신간회 청도 지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신간회 청도 지회 해체
성격 사회 운동 단체
설립자 김갑수|김종환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 합작체로서 신간회가 결성된 뒤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같은 해 6월 신간회 김천 지회를 시작으로 1929년 7월까지 모두 21개의 지회가 각 지역에서 결성되었으며, 회원으로 3,400여 명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간회 청도 지회는 1928년 5월 12일에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

신간회 청도 지회는 신간회 본부의 활동 방향에 따라 청도 청년회(淸道 靑年會)·의우단(義友團) 등과 연계 속에 사회 활동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1927년 4월 12일에 의우단은 집행 위원회를 열고 신간회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27년 가을에는 청도 청년회의 간부 김갑수(金甲洙)·김종환(金鍾煥) 등이 중심이 되어 신간회 설립에 나섰다. 1928년 4·5월 무렵에 이르러 김갑수, 임용우(任龍佑), 배정찬(裵正瓚), 정기봉(鄭奇鋒) 등은 설립 위원이 되어 신간회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1928년 5월 12일에 신간회 청도 지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 청도 지회는 1928년 5월 12일, 도주 학원(道州 學院)에 있던 청도 청년 회관(淸道 靑年 會館)에서 설립 대회를 개최하였다. 경찰의 삼엄한 경계 아래 열린 설립 대회에서는 먼저 김갑수의 개회사와 지회 설립에 대한 경과보고와 결의안 통과, 그리고 신간회 청도 지회 설립을 축하하는 뜻에서 만세 삼창을 하였다. 창립 당시 신간회 청도 지회는 임원진은 회장 최태현(崔泰鉉), 부회장 홍삼생(洪三生), 간사 김갑수, 임용우, 이종윤(李鍾潤), 설병근(薛昞根), 오춘(吳春), 김재봉(金在奉), 박동건(朴東乾), 예종도, 김용태(金用泰), 도시춘, 대표 회원 김창완과 김갑수 등이었다.

1928년 5월 12일 신간회의 임원들은 신간회 청도 지회의 운영과 관련된 결의안을 마련하였다. 채택된 결의안은 언론·집회·출판 및 결사 자유권 획득, 재만 동포 생존권의 보장, 조선 아동의 의무 교육제 확립, 민족 단일당 촉성 운동에 대한 반동 사상, 노동 농민 교육의 려행(勵行), 예산안 편성의 건, 회원 증모의 건, 회록 제작의 건 등이 있었다.

그리고 집행부의 부서를 조직하고 각 부서의 임원을 선정하였다. 부서는 서무부·정치 문화부·재정부·조사 연구부·조직 선전부로 나누었다. 서무부·정치 문화부에는 상무 간사와 간사를 두었다. 서무부 상무 간사에는 설병근, 간사에는 변석한(邊碩漢)과 예종도가 선임되었고, 정치 문화부 상무 간사에는 박동건 외 1인, 간사에는 도시춘이 선임되었다.

재정부·조사 연구부·조직 선전부에는 총무 간사와 상무 간사 그리고 간사를 두었다. 이름을 확인할 수 있은 임원으로는 재정부의 총무 간사 이종윤·간사 김재봉, 조사 연구부의 총무 간사 임용우, 상무 간사 김용태, 간사 오춘, 조직 선전부의 총무 간사 정기봉, 간사 김갑수가 있다.

1928년 5월 22일에 신간회 청도 지회는 부회장 홍삼생의 집에서 제2회 간사회를 개최하였다. 회장 최태현의 사회로 진행된 간사회에서는 당면 정책 문제, 간사 진퇴의 건, 회원 증모의 건, 예산 편성의 건, 회관 문제의 건, 상무서기 선임의 건 등을 논의하였다. 제2회 간사회에서는 박동건, 설병근, 김재봉 간사가 퇴임하고, 김도윤, 박재헌(朴在憲)이 보선되었다.

1929년 6월에 이르러 서울에서 전국 대회를 대신하여 복대표 대회가 열리고, 대구·청도·하양·신녕의 대구를 대표하는 대표자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자, 신간회 청도 지회는 1929년 5월 23일 대구 지회에서 개최된 대표자 선정 회의에 임일(任一)을 참석시켰다. 임일의 사회로 진행된 이 회의에서는 대구구의 대표로 김선기를, 부대표로 송두환을 선정하였다.

1930년 이후 신간회 청도 지회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1930년 7월까지 신간회 청도 지회가 그 명맥을 이어갔다는 것은 자료에 확인되지만 활동은 매우 미미하였던 것 같다. 1931년 전국에서 지회들이 해체될 즈음 신간회 청도 지회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 청도 지회는 청도군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박재 구제회(雹災 救濟會)였다. 1928년 6월 중순 박재(雹災)로 말미암아 풍각면을 비롯한 각북면, 각남면, 유천면의 1,800여 호가 농작물과 가축 피해를 입자 피해 지역의 주민을 위문하고, 『중외 일보』와 『동아 일보』 지국의 후원으로 1928년 6월 15일에 박재 구제회를 마련하고, 회장 최태욱, 부회장 이여희, 서무 재무부 홍삼생, 설병근, 김갑수, 조사 구제부 임일, 오춘, 정기봉, 선전부 김도육, 도시춘, 김태수(金泰秀) 등이 중심이 되어 구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현황]

1930년 이후 청도 지역에서는 신간회 청도 지회청도 청년회 등의 사회 운동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신간회 해소 이후 조선 공산당 재건 그룹의 활동이 눈에 띄지만 청도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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