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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74
한자 農民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사항 시기/일시 1921년 1월 - 농민 운동 삼군 소작인 동맹회 결성
특기사항 시기/일시 1922년 봄 - 농민 운동 풍각면 농사 개량 조합 결성
특기사항 시기/일시 1924년 3월 - 농민 운동 풍각 소작 조합 결성
특기사항 시기/일시 1926년 10월 - 농민 운동 청도 소작 조합 결성

[정의]

일제 강점기 청도 지역의 농민들이 정치·경제·사회적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전개한 사회·경제 운동.

[개설]

일반적으로 농민 운동은 노동 운동과 같이 계급으로서의 농민이 스스로의 노동 조건과 경영 조건을 유지·개선·확장하기 위해 또는 정치·경제·사회적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단결해서 행동하는 조직적 투쟁을 말한다. 조선 시대 말 동학 농민 운동과 일제 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소작 쟁의(小作爭議)를 포함한 일련의 농민 운동이 있다.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군의 농민 운동은 일제의 농업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생활 조건의 개선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일제의 농업 정책과 청도군]

1910년 한국 강점에 성공한 일제는 정치·행정은 물론 산업·경제를 장악하고자 했다. 일제의 농업 정책은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한 토지 수탈과 수탈 기구의 정비였다. 그래서 농민에 대한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농업 단체’를 조직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 일제의 수탈 정책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일제는 수탈 농정을 좀 더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한국 농민과 농업 전반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농업 지배 기구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수탈 기구가 농회와 금융 조합, 산업 조합과 같은 각종 농업 단체·산업 단체였다. 청도군에서도 이러한 단체들이 조직되어 농민에 대한 지배 기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도군 농민의 실태]

1917년 청도군의 총 호수는 1만 5631호, 인구는 8만 2309명이며, 한국인 호수는 1만 5459호, 인구는 8만 1706명이었다. 그중 88.9%에 해당하는 1만 3895호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일본인은 청도 전체 인구의 0.7%에 해당하는 171호, 인구는 600명이었다. 일본인들은 상업 및 교통업[76호]과 공무 자유업[48호], 그리고 농업[38호]에 종사하였다.

1917년 청도군의 농가 호수 1만 4029호를 경영 형태별로 구분하면, 지주 52호[0.4%], 자작농 993호[7.1%], 자소작농이 9,027호[64.3%], 소작농이 3,957호[28.2%]이다. 지주와 자작농, 그리고 소작농의 비율은 전국·경상북도보다 낮고, 자소작농의 비율은 높다. 특히 자작농은 7.1%로 매우 낮고, 자소작의 비율이 높다. 1917년 청도군의 경지 면적과 자소작지의 규모를 비교해도 토지의 소작지율이 높다.

1920년대를 거쳐 1931년에 이르면 청도군의 소작농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청도군은 1917년 순 소작농의 비율이 28.2%로 경상북도내 전체 평균치에 비해 소작농의 비율이 낮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를 거치면서 무려 25%에 가까운 소작농의 증가로 인해 농민의 절반에 가까운 53%가 순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1920년대 청도군 소작농의 증가는 고령[29%]·영양[28%]·예천[25%]에 이어 도내 4위를 차지할 정도로 급격하였다.

이러한 소작농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농민들은 소작지를 구하기 위한 차지 경쟁(借地競爭)에 시달렸고, 과중한 소작료 또한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태가 연속되는 1930년대에 이르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다.

[청도군의 농민 운동 전개]

일제 강점기 각 지역의 농민 운동·노동 운동은 대체로 1920년 조선 노동 공제회 지회가 만들어지면서 출발하지만, 청도 지역에서는 조선 노동 공제회와 관련된 기록이 없다.

1920년대 전반기 청도 지역 농민 운동을 주도한 농민 단체는 1921년 1월 조직되는 삼군 소작인 동맹회(三郡小作人同盟會)와 1922년 봄에 조직되는 풍각면 농사 개량 조합, 그리고 1924년 3월 조직되는 풍각 소작 조합 등이 있었다. 이러한 농민 단체들은 1920년대 전반기 소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도·달성·경산 세 군의 소작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삼군 소작인 동맹회는 지주의 지세 부담을 요구하며, 소작인에게 지세를 전가하는 지주의 땅을 경작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풍각면 농사 개량 조합은 1923년 3월 소작료를 불공평하게 받는 경북 부호 장길상(張吉相)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불경 동맹 운동(不耕同盟運動)을 펼쳤다. 그리고 풍각 소작 조합은 1924년 3월 23일 정운해(鄭雲海)·김정규(金正圭)·김하정(金夏鼎) 등 조선 노농 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인사들을 초빙하여 소작 연설회를 열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기 청도 지역 농민 운동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1926년 1월 조선 농민사(朝鮮農民社) 청도 지부(淸道支部)가 설치되었고, 1926년 10월에는 청도 소작 조합(淸道小作組合)이 조직되었다. 조선 농민사 청도 지부는 김봉(金烽)이 지부장을 맡았으며, 사무실은 청도역 앞에 있었다. 그리고 청도군과 경산군에 걸쳐 사우(社友)를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청도 소작 조합은 1927년 4월 청도 소작 조합 회관에서 긴급 상무회의를 열고, 정재학(鄭在學) 등 무리한 부역을 요구하는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권 이동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 밖에 청도 지역에서는 제로 노동회청도 소비 조합(淸道消費組合) 같은 조직이 있었다. 제로 노동회는 노동 야학을 통해 농민들의 문맹 퇴치에 주력하였다. 청도 소비 조합은 1926년 10월 중산 계급 이하 농민들의 생활 안정과 지방 경제의 발달을 촉진한다는 목적 아래 설립되어 비료를 구입하여 일반 농민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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