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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청년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41
한자 淸道靑年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0년 7월 18일연표보기 - 청도 청년회 창립
해체 시기/일시 1928년 12월연표보기 - 청도 청년회 해체
최초 설립지 청도 청년회 - 경상북도 청도군
성격 청년 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개설]

청도 지역의 청년 운동 단체는 1920년에 들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1920년 7월 청도 청년회가 설립된 이후 1923년 성현 청년회(省峴 靑年會), 1924년 풍각 수양단(豊角 修養團), 1926년 유천 청년회(楡川 靑年會), 1927년 풍각 청년회(豊角 靑年會)·대성 청년회(大城靑年會)·풍각 기독교 청년회(豊角 基督敎 靑年會)가 조직되었다.

[설립 목적]

청도 청년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지식 계발, 민중 계몽을 위한 문화 사업 외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변천]

청도 청년회는 1920년 7월 18일 경상북도 청도군 공립 보통 학교에서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청도 청년회 발기인 대표 김경태(金炅泰)의 취지 설명에 규칙 심의와 임원 선출이 이루어졌다.

청도 청년회의 임원은 회장 김정배(金丁培), 부회장 김만성(金萬聲), 총무 김창완(金昌琬), 서무부장 김경태(金炅泰), 학예부장 하병육(河秉六), 운동부장 김덕배(金德培), 서기 박경태(朴敬泰)·김명용(金命用), 간사 6명이 선임되었다.

청도 청년회의 제2회 총회는 1920년 8월 1일에 청도군 구객사(舊客舍) 안에서 열렸다. 총회에 참석한 인원은 300여 명이나 되었으며, 회장 김정배(金丁培)의 개회사와 회무 보고에 이어 강연회가 이루어졌다. 부회장 김만성이 ‘오인(吾人)의 희망(希望)’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대구 청년회에서 온 남정구(南廷九)의 축사에 이어 서만달(徐萬達)이 ‘현대 요구(現代要求)의 건실한 청년’, 이명석(李命錫)이 ‘종교와 교육’, 양규식(梁圭植)이 ‘오인(吾人)의 급무’, 서동진(徐東辰)이 ‘단체의 청년’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날 의연금을 모았는데 그 액수가 약 2,800원에 달하였다.

제2회 정기 총회는 1922년 3월 4일에 서상동(西上洞) 예배당에서 열렸다. 각 부의 회무 보고와 회의 방침을 결의하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개선된 임원은 회장 최태현(崔泰鉉), 부회장 이원우(李元雨), 총무 김경태, 서무부장 강태지(姜泰至), 학예부장 강해식(姜海植), 운동부장 오재숙(吳載淑), 사회부장 김명용(金明用), 재무부장 최덕수(崔德壽), 사찰부장 박영범(朴榮範), 산업부장 문덕수(文德壽), 평의장 이정희(李庭禧), 평의부장 김명현(金明賢), 평의원 김표홍(金杓鴻)·김만성(金萬聲)·도주갑(都周甲)·김재근(金在根)·도영진(都榮鎭)등이며, 각부의 간사가 10명이었다.

1925년 11월 25일에 개최된 혁신 총회인 추계 정기 대회에서 청도 청년회는 회장제를 집행 위원회제로 바꾸었으며, 1928년 7월 30일에 청도 청년 동맹이 조직된 뒤, 1928년 12월에 청도 청년회는 그 조직을 해체하고 청도 청년 동맹을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청도 청년회는 위생 사업·운동회·순회 연극·대강연회·토론회·금주 동맹 운동·소비조합 운동과 같은 다양한 활동들을 펼쳤다. 즉 청도 청년회의 활동은 지·덕·체를 중시하는 교육·문화 활동, 그리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교육·문화 활동으로는 체육 활동·순회 연극·강연회·토론회를 들 수 있다. 청도 청년회는 1921년 4월 8일에 청도 공립 보통학교에서 운동회를 개최하였으며, 학예부는 1922년 2월 2일부터 순회 소인극을 열었다.

또한 청도 청년회는 1922년 2월 11일에 서상동 예배당에서 51회 대강연회(大講演會)를 개최하였다. 연사는 최태석(崔泰錫)과 최태현(崔泰鉉), 그리고 학예부장 강해식(姜海植)이었다. 이날의 강연이 제51회였던 것으로 보아 강연회는 청도 청년회의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청도 청년회는 정기 토론회를 열었다. 1922년 2월 25일에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면 서상동(西上洞) 예배당에서 정기 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운동이 승어 학문(勝於 學問)’이란 주제로 토론을 하였다.

청도 청년회는 지식 계발과 문화 사업 외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2년 3월 7일에 조직된 금주 동맹회(禁酒 同盟會)와 4월에 조직된 소비조합 의양사(宜陽社)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청도 청년 금주 동맹은 1922년 3월 7일에 송정(松亭)에서 조직되었다. 청도 청년회 임원 가운데 여기에 참여한 임원은 회장 강태지(姜泰至), 총무 김경주(金景珠), 사찰 김석범(金碩範)·김한봉(金漢奉), 간사 정원국(鄭元局)·박달희(朴達熙)이다.

소비조합 의양사는 청년회의 부속 사업으로 운영되었는데 소민(小民)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 사업은 총 계좌 수 4,000계좌[한 계좌 12원씩] 가운데 3,000계좌가 모집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밖에 위생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청도 청년회는 1920년 8월 11일에 청도군 화양면에서 콜레라가 발생하자 청도군 경찰서와 함께 방역단을 조직하고, 방역과 예방 주사를 놓는 활동을 펼쳤다.

[의의와 평가]

1920년 7월 18일에 창립된 청도 청년회는 청도 지역의 교육 문화 운동과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제2회 정기 총회에서 피선된 이정희를 비롯하여, 제51회 대강연회의 연사 최태석과 최태현 등은 청도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인사들이었다. 특히 1922년 조직된 금주 동맹회와 소비조합 의양사는 1920년대 초기 청년회가 전개하는 사회 운동의 성격을 보여주는 조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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