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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15
한자 部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집필자 강래업

[정의]

삼국 시대로부터 조선 시대 초까지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에 존속했던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

[개설]

부곡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대체로 호족 세력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천민(私賤民)의 신분 계층을 의미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행정 구획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곡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이른바 향·부곡 등의 잡소는 거듭하여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所謂鄕所部曲等雜所不復具錄).”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미 삼국 시대부터 부곡이 존재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주목(驪州牧) 고적 조(古跡條)에 있는 등신장(登神莊)에 관하여 “이제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현을 설치할 때 그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향 또는 부곡으로 두어 그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부곡은 인구나 토지가 군이나 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 시대에 발생하기 시작한 부곡은 신라 말 고려 초에 후삼국 통합 전쟁의 와중에서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 해체 소멸되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에는 군현(郡縣)이 되거나 군현의 임내(任內) 지역인 속현(屬縣)이 되면서 부곡민들의 신분도 상승하여 양인이 되었으며, 16세기에는 완전 소멸한다. 고려 시대 군현제의 하부 구조로 존재했던 부곡은 군현제를 통해 간접 지배를 받았으며, 국가 직속지를 경작하거나, 때로는 군성을 수축하는 역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청도군 부곡 관련 기록]

『경상도지리지』에는 밀양의 임내(任內)인 두야보 부곡(豆也保部曲)과 월경처가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청도군 읍지(1879)』에는 고적 조에 “매전 부곡(買田部曲)[지금은 역이 있다], 북곡 부곡(北谷部曲)[군 동쪽 25리(9.818㎞)], 부곡 부곡(釜谷部曲)[군의 북쪽 15리(5.891㎞)]” 등 3곳의 부곡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청도 문헌고』에는 위 3곳 부곡 외에 거연 부곡(巨淵部曲)[군의 남쪽]이 기록되어 있다.

[청도군 부곡 관련 내용]

청도와 관련된 부곡은 밀양의 임내였던 두야보부곡과 청도에 속한 매전 부곡, 북곡 부곡, 부곡 부곡, 거연 부곡이 있었다. 두야보 부곡은 그 설치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청도 지역 여러 곳에 월경처가 있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두야보 부곡에 속한 월경처로 청도의 동촌 상곡리(上谷里), 향인촌(向仁村), 동촌 고미리(古弥里), 동촌 정역리(井亦里), 동촌 노적리(露赤里), 자물역(自勿亦), 지촌(知村) 등이 있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청도 지역에 있었던 고대 국가인 이서국을 병합한 이후 옛 이서국 지역에 대성군(大城郡)을 설치하고 소산현(蘇山縣), 형산현(荊山縣), 오악현(烏岳縣)을 3현(縣)을 속하게 하였다. 3현을 제외한 현재의 청도군 지역을 빙 둘러싸고 있는 외곽 지역은 분할하여 부곡을 설치하고 밀양의 비입지로 삼았다고 추정된다. 두야보 부곡은 신라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군사 주둔지였던 곳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밀양의 월경처를 바탕으로 설치한 부곡이다. 반면에 청도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부곡 부곡, 거연 부곡, 북곡 부곡, 매전 부곡은 수공업이나 역(驛)에 소속되었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로 추정된다.

[부곡의 위치와 변천]

『동국여지승람』 읍지류 청도군 편을 살펴보면 매전 부곡은 바로 매전역에 위치하며, 북곡 부곡은 동쪽 25리에 위치하고, 부곡 부곡은 북쪽 15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전 부곡은 매전역이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매전면 동산리 부근이며, 북곡 부곡은 주변 건현(巾峴)이라는 지명으로 현재의 청도읍 원정리 안쪽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야보 부곡은 일명 도련 부곡(道連部曲)이라고도 하였으며, 신라 시대에 창녕군에 속했던 풍각현이 고려 초에 청도군으로 귀속되면서 1452년경에 밀양 임내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초에서 조선 초까지 지속되었으며, 1409년 대부분 부곡이 군현에 해체 및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두야보 부곡은 고려 초 청도군 내에 위치하였지만 징세, 노역 및 행정까지도 밀양군에서 관할하였다.

[부곡의 규모]

『경상도지리지』에는 당시 두야보 부곡의 구성은 인호가 39호, 전지는 188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두야보 부곡에 소속된 동촌 5개의 마을에 대한 명칭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노적(露赤)[현재의 청도군 매전면 두곡리], 자물역(自勿亦)[현재의 청도군 금천면 사전리], 지촌(知村)[현재의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고니리(古祢里)[현재의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공암리] 등인데, 이들은 산촌(散村)으로 넓은 지역에 흩어져 위치하였다. 두야보 부곡에 거주하는 성씨들은 『동국여지승람』에는 ‘백, 노, 박’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외 다른 부곡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매전역으로 바뀐 매전 부곡에 대해서는 『여지도서』[1757년]에 지금은 역리가 되어 있다고 기술하며, 중마 2필, 점마 8필, 아전 22명, 노비 13명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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