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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146
한자 校村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윤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79년 -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에서 청도군 화양읍 교촌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에서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3.05㎢
가구수 47가구
인구[남,여] 101명[남자 50, 여자 51명]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교리와 죽촌을 합해서 교촌이라 하였다. 교리(校里)는 청도 향교가 있어 교리라 부르며, 죽촌은 조선 초기 성종 조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지할 때 죽림사를 폐사하고 그 절을 대밭으로 만들어 관죽전(官竹田)을 삼고 스님을 양죽인(養竹人)으로 하였다는 옛 기록에 관죽전이 있어 죽촌이라 부른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향교가 처음 시행 될 때에 절의 방사를 빌려 향교로 삼았다는 『탁영지』의 기록과 옛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곳은 향교가 처음 시작되기도 하였거니와 영조 때 마지막 정착지가 이곳이어서 교촌이라 불렀다고 하며 뒷날 유교가 성하고 불교가 쇠퇴할 때 절을 없애고 대밭으로 만들어 죽촌이라 불렀다가, 다시 향교가 지금의 장소로 옮겨오면서 향교와 죽촌이 합해져서 교촌이라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이전에는 마을 안쪽 대밭이 있는 곳은 죽촌이었고 향교가 있는 곳은 교리였다. 이후 1979년 화양면화양읍으로 승격하면서 화양읍 교촌동이 되었고, 1988년 교촌동에서 교촌리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중심에 청도 향교가 있는 이곳은 예전엔 청도군의 이속(吏屬)들의 개인집으로 형성되었던 곳에 1734년(영조 10)에 합천리(合川里)에서 이곳으로 향교가 옮겨오면서 향교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읍지에는 소사(小寺)를 없애고 대밭을 만들어 절에 있던 승려를 양죽인(養竹人)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죽림사(竹林寺)의 옛 터가 이곳이 아닌가 한다.

[자연 환경]

오산 자락 낮은 산등에 자리 잡은 교촌리는 옛 청도 동헌 뒤쪽 언덕 위에 자리하다. 교촌리동천리의 경계에는 속칭 남산 13곡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다. 남산 계곡에는 여러 곳에 선현들의 글씨를 새겨 놓은 바위들이 계곡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옛날 가뭄이 들면 군수가 직접 기우제를 흔적의 음용지와 운금천, 질양석, 석문을 지나면 시정(詩亭)이 있다. 또 유하담을 지나 옥정암 아래에는 용항이 있고 용항 위에는 봉황대가 있으며, 봉황대 위에는 금사계와 모선동이 있다.

[현황]

2012년 현재 면적은 3.05㎢이며, 총 47가구에 101명[남자 50명, 여자 51명]이 살고 있다. 동쪽과 화양읍 교촌리, 서쪽은 화양읍 서상리·신봉리·각남면 칠성리·사리, 남쪽은 청도읍 상리, 북쪽은 화양읍 동상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교리과 죽촌이 있다. 국도 20호선과 연결되는 도로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인 청도 향교는 건물이 모두 8동이 있으며, 향교 담장 안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다. 교촌리에는 청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수돗물 가압장이 있고, 화강지(華岡池)라는 저수지가 있으며 화강지 언덕 위에는 화악루(華岳樓)가 있다. 화강지를 축조할 때 일한 인부들이 전하는 말에 둑을 쌓은 데 쓸 넓적한 큰 돌을 들어내면 돌방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토기가 무더기로 나왔다고 한다. 그때 인부들은 재수가 없다고 하여 토기를 모두 돌로 쳐서 깨 버렸다고 하는데, 뒷날 이것이 고분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교촌에는 2개의 석간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는데 예전부터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 아무리 가물거나 장마가 때에도 물의 양이 불거나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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