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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171
한자 金五同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복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3년연표보기 - 김오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0년 5월 - 김오동 차산 서당 한학 3년 수료
활동 시기/일시 1980년 12월 - 김오동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4호로 지정
몰년 시기/일시 2002년 12월 18일연표보기 - 김오동 사망
출생지 김오동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풍각 보통학교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699번지지도보기
활동지 김오동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
성격 농악인
성별
대표 경력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제4호

[정의]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차산 농악 상쇠이자 선소리꾼 농악인.

[개설]

김오동(金五同)[1923∼2002]은 차산 농악의 유일한 기능 보유자로서, 60년 인생을 농악에 바쳐온 상쇠의 명수이다. 김오동차산 농악을 전수하고 발전시킨 공로자이며, 그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차산 농악은 비교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김오동의 고향 차산리는 속칭 신라 고촌이라 불릴 만큼 역사 깊은 마을로 예로부터 정초가 되면 풍각면 내의 여러 마을은 물론 고개 넘어 창녕군 마을까지 참여하여 화려한 천왕기 싸움을 벌였다. 천왕기 싸움은 길이 6∼8미터에 가까운 여러 가지 색으로 단장된 천왕기를 앞세우고, 마을의 농악대가 풍각 장날인 정월 11일, 장터에서 각 마을의 위세를 자랑하였는데 차산 농악은 바로 이 천왕기 싸움을 발판으로 발전한 농악이다.

김오동은 당시 마을의 상쇠였던 큰형 김시동에게 차산 농악을 전수받았다. 김시동은 옆 마을 현리의 탁월한 상쇠인 수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큰형 김시동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김오동이 뒤를 이어 상쇠가 되어 차산 농악을 이끌었다.

[생애]

김오동은 1923년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상쇠인 큰형 김시동의 영향을 받아 성장기에 농악이나 농요·지신밟기·무굿[당시 마을에 당골 형태의 무당이 있었다고 함]을 자연스레 접하고 성장하였다.

1937년 풍각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차산 농악에 입문하였고 1940년 5월 차산 서당에서 한학을 3년 수료한 이후, 일제 강점기 말엽인 20세를 전후해 강제 징집을 당해 일본 오키나와로 끌려가 북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여기서 미군의 융단 폭격으로 한쪽 눈이 빠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 포로로 잡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타고난 신명을 주체하지 못하고 깡통으로 매구를 만들고 천으로 북을 씌워서 악기를 치고 노니 미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하면서 계속 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농사를 짓기도 하고 소시장에서 소 중개인이 되어 장사를 하면서 창녕·밀양·대구·경산 등을 왕래하였다. 마을에서는 선·후배나 동기들과 모여 농악 기물을 사서 농악 연습으로 신명 풀이를 하고, 소시장에 가서는 주막에서 가무악이 어우러진 풍악을 울렸다. 또 농사철에는 벌판에서 농요로 목청을 한껏 높였고 정월에는 지신밟기 소리로 마을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농악단을 꾸리고 농악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창녕 3·1 문화제, 밀양 아랑제, 대구 전국 농악 대회, 진주 개천제 등 수많은 대회에 나가 수상하였다. 그러던 차에 1970년 중반에 민속학자인 김택규와 만나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출전하게 되어 농요 부문 장관상 2회, 농악 부문 장관상 1회, 개인상 1회를 수상하고 1980년 12월 경북 무형 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김오동의 노력에 힘입어 1991년 청도 차산 농악 전수관이 착공되어 몇 차례의 증축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차산 농악의 보존과 전승에 기여하던 김오동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지병인 당뇨병으로 활동을 못하다가 2002년 12월 18일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연 및 수상 내역]

김오동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농악단을 꾸리고 농악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수많은 대회에서 수상하였다. 1957년 3월 부산 전국 농악 경연 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1959년 9월 대구시 주최 농악 경연 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3월에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 3·1 문화제 전국 농악 경연 대회에서 1위를 하였다. 1964년 3월 경상남도 영산 문화제 주최 전국 농악 경연 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했고, 1965년 전국 농악 경연 대회에서 1등을 했으며, 1972년 밀양 아랑제 전국 농악 경연 대회에서도 1등을 하는 등 수많은 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였다. 또한 88올림픽 기념 공연을 비롯하여 대전 엑스포와 경주 문화 엑스포에서도 초청 공연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김오동은 조카인 김위근[1996년 작고]을 보유자로 삼으려 했지만 사망하였고 차산리의 박수운을 부쇠로 두었는데, 그도 1989년 세상을 떠났다. 1970년 후반에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나가면서 영남 대학교 민속 보존 연구회와 인연을 맺고 상쇠 계보를 이어 가게 되었는데, 10여 명의 쇠잡이를 배출하였으나 이름을 꼽을 수 있는 이는 김정한·정병철·정중현·추현태·김태훈·손정우 정도이다. 그리고 지금 활동 중인 이는 추현태·김태훈뿐이다. 1984년에 풍각면 소재의 풍각 농고 농악반을 만들어 추현태와 상쇠 김오동이 직접 지도하여 상쇠 계보를 잇게 되었는데, 그 중 조일환·백진환·박준오를 꼽을 수 있다.

현재에도 김오동이 키운 제자들[영남 대학교 민속 보존 연구회, 풍각 농고 농악반 등]에 의해 청도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청도 차산 농악의 얼이 울려 퍼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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