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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133
한자 崔泰碩
이칭/별칭 예숙(禮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 173번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0년 1월 1일연표보기 - 최태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41년 2월 15일 - 최태석 비밀 결사 다혁당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9월 - 최태석 대구 경찰서 형사대에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1월 7일 - 최태석 대전 지방 법원에 기소
활동 시기/일시 1941년 11월 7일 - 최태석 공주 경찰서에서 대전 형무소로 이감
활동 시기/일시 1943년 2월 8일 - 최태석 예심 종결
활동 시기/일시 1943년 11월 - 최태석 징역 2년 6개월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3월 - 최태석 만기 석방
몰년 시기/일시 1995년 10월 9일연표보기 - 최태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최태석 애족장 추서
관련사건 시기/일시 1941년 8월 - 다혁당 사건
출생지 최태석 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 173번지지도보기
활동지 최태석 활동지 -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 173번지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청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태석은 19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송원리(松院里) 17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41년 조직된 다혁당(茶革黨)에서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최태석(崔泰碩)[1920∼1995]은 대구 사범학교에 재학 중인 1941년 2월 15일 밤 8시에 같은 학교 학생 문홍의(文洪義)·배학보(裴鶴甫)·최영백(崔榮百)·김효식(金孝植)·류흥수(柳興洙) 등 15명과 함께 대구 대봉정에 있는 류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 결사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은 대구 사범학교에 조직되어 있던 비밀 결사 문예부(文藝部)·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의 백의단(白依團)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으로 확대·개편한 것이었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인 조직으로 확대하여 다른 학교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하였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와 그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최태석은 육상 경기부 책임을 맡았다.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 엄수와 절대 복종 및 주 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 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 상황과 조직 확대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한국인 학생인 심상과 학생과 일본인 학생인 연습과 학생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1940년 1월 다혁당은 비밀 기관지 『반딧불』을 간행하였는데, 1941년 7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대구 사범학교 비밀 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최태석도 일제 경찰의 체포 대상이 되었다. 최태석은 이 잡지에 「구름 한 점 없이 개인 어느 중추의 오후」라는 시를 게재하였다.

1941년 8월 다혁당에 대한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고 최태석은 1941년 9월 대구 경찰서 형사대에 검거되어 공주 경찰서에 수감되었으며, 1941년 11월 13일 대전 형무소에 이감되었다. 1941년 11월 7일 대전 지방 법원에 기소되어 2년간의 예심을 거쳐 1943년 2월 8일 예심이 종결되고, 1943년 11월 말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45년 3월 만기 석방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9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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