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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1043
한자 朴楊茂
이칭/별칭 약생,두촌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845년 - 박양무 훈령 서원에 배향
묘소|단소 박양무 묘소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상리지도보기
묘소|단소 두촌재 -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상리
사당|배향지 훈령 서원 -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밀양
대표 관직|경력 찰방

[정의]

고려 후기 청도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약생(若生), 호는 두촌(杜村). 밀직 부사 박양언(朴良彦)의 후예로서, 할아버지는 중서령 박원광(朴元光)이고 아버지 보승오위 박기봉(朴奇鳳)의 둘째아들이다. 청도 밀양 박씨 밀직부사공파 두촌공 문중의 입향조이다. 어머니는 직장 김인계(金仁桂)의 딸로서 경주 김씨이다. 처는 현령 백문질(白文質)의 딸로서 청도 백씨이다.

[활동 사항]

박양무(朴楊茂)[?∼?]는 고려 후기 공민왕 때 급제하여 선무랑(宣武郞)에 오르고 김천(金泉) 독우(督郵)[찰방]를 지냈으며, 포은 정몽주 문도들과 교유하며 준재로 촉망 받았다.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보고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만수산(萬壽山)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가 막역지우인 우현보(禹玄寶) 등 만수산 동지들에게 “사직이 없어졌는데 선사(先祀)마저 받들지 않는다면 훗날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군친(君親)을 뵈오리까.”라는 말을 남기고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낙향하였다.

청도군 화양읍 대성산(大城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스스로 두촌이라 호를 지었다. 세상에서도 이를 두고 두문동 72현과 같다고 하여 그를 ‘두촌 선생(杜村先生)’이라 불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상리 한재에 있다. 참판 민병승(閔丙承)이 찬한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845년(헌종 11)에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훈령 서원(薰嶺書院) 숭절사(崇節祠)에 향사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71년에 훈령 서원이 중창되고 1986년에 숭절사도 복설되었다. 묘재인 두촌재(杜村齋)가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상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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