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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986
한자 徐文重
이칭/별칭 도윤,몽어정,공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34년연표보기 - 서문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5년연표보기 - 서문중 청도 군수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76년연표보기 - 서문중 청도 군수에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80년 - 서문중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6년 - 서문중 공조 판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87년 - 서문중 형조 판서 겸 종묘·빙고의 제조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서문중 우참찬으로 재직 중 기사환국으로 실각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서문중 갑술환국으로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됨
활동 시기/일시 1698년 - 서문중 우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99년 - 서문중 좌의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02년 - 서문중 영의정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09년연표보기 - 서문중 사망
거주|이주지 서원중 이주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대구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서문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기사환국 때 노론의 중신으로 인현 왕후의 폐위를 반대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등용되었으나, 희빈 장씨 및 남인에 대한 처리에 온건론을 주장하다 조정에서 배척을 받아 은퇴했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도윤(道潤), 호는 몽어정(夢漁亭). 남원 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아들로, 당숙인 함경도 관찰사 서원리(徐元履)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상황]

서문중(徐文重)[1634∼1709]은 1657년(효종 8)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73년(현종 14) 학행으로 천거되어 동몽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몇 차례 승진한 후 1675년(숙종 2) 8월에 청도 군수로 부임하여 선암 서원(仙巖書院)을 중건하였고, 청도 사찬 읍지인 『오산지』를 속수(續修)하였다. 또한 1666년(현종 7) 군수 윤의지가 이건했던 동헌을 1676년(숙종 3) 옛터로 다시 이건하였다. 이건했던 곳에서 윤의지·유비·권일 등의 군수가 연달아 횡사했기 때문이다. 1676년 12월에 파직되었다.

이후 이천 부사·상주 목사를 역임한 후 1680년(숙종 7)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당상관에 올랐다. 이듬해 광주 부윤이 되어 남한산성 수축에 힘쓰고 1682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너무 빨리 승진한다는 말이 있어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호조 참판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서 재판을 공정히 하는 데 크게 노력하였으며,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군액을 감하자고 건의하였다. 그 뒤 예조 참판·도승지·공조 참판을 거쳐 1686년 공조 판서가 되어 군량미 비축에 힘쓰고, 다음해 형조 판서 겸 종묘·빙고(氷庫)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 세력이 득세할 때 우참찬으로 재직하다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경주 부윤과 강릉 부사를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자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등용되었으나 희빈 장씨 및 남인에 대한 처리에 온건론을 주장하다 조정에서 배척받아 금천(衿川)[지금의 시흥]으로 퇴거하였다.

그 후 박세채(朴世采)의 건의에 의하여 서용되어 훈련 대장·형조 판서·병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695년에서 이듬해까지 진휼에 공을 세우고 1698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나라에 파견되어 세자 책봉을 요청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고, 1701년 판중추부사로 호위 대장을 겸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학문과 저술]

독서를 좋아하여 하루도 책을 보지 않는 날이 없었다. 특히 사적(史籍)에 관심이 많아 역대 사실을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 지리적·군사적 사정을 정리하여 『해방지(海防誌)』를 엮었고, 의정부에 재직할 때는 각 지방의 성지(城池)·토전(土田)·호구·곡물·전함·봉수·진보(鎭堡)·우역(郵驛)·군대 등을 조사하여 『군국총부(軍國摠簿)』를 저술하였다. 그밖에도 조선 시대의 여러 고사를 엮은 『조야기문(朝野記聞)』·『상제례가범(喪祭禮家範)』·『역대재상연표(歷代宰相年表)』·『국조대신연표(國朝大臣年表)』·『병가승산(兵家勝算)』·『동인시화(東人詩話)』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치적으로 소론(少論) 입장이었고, 군사 제도와 그 운영에 밝았으며 진휼에 정성을 쏟았다. 넓은 도량과 굳은 지조가 있었으며 평생을 조심하며 한결같이 근신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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