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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739
한자 縣里里碑石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 74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93년 - 현리리 비석 떼 서희순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86년 - 현리리 비석 떼 정시용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99년 - 현리리 비석 떼 김기현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57년 - 현리리 비석 떼 서희순 사망
현 소재지 관찰사 우재 서 상국 휘 희순 만세불망비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 743지도보기
현 소재지 판관 정시용 거사비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 743지도보기
현 소재지 판관 김 후 기현 선정비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 743지도보기
성격 선정비
관련 인물 서희순|정시용|김기현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서희순 불망비 : 230㎝[높이]|53㎝[너비]|정시용 거사비 : 147㎝[높이]|41.5㎝[너비]|김기현 선정비 : 186㎝[높이]|45㎝[너비]
소유자 청도군청
관리자 청도군청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선정비 떼.

[개설]

서희순(徐憙淳)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 자는 치회(穉晦), 호는 우란(友蘭),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1816년(순조 16)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한 이래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이조·예조 참판, 직제학 등을 지내고, 1833년(순조 33)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835년(헌종 1) 대사헌과 형조 판서에 올랐다. 그 뒤 한성부판윤과 예조·병조·형조·호조·이조 판서 및 좌참찬, 판돈녕부사·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1855년(철종 6) 진위 겸 진향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정시용(鄭始容)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지(有之)이며, 부친은 청도 군수(淸道郡守) 정동면(鄭東勉)이다. 1814년(순조 14) 갑술(甲戌) 식년시(式年試)에 생원시 합격 후 음직으로 황간 현감, 교하 군수, 대구 판관 등 중외(中外)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1854년(철종 5) 기로 정시(耆老庭試) 문과에 69세로 급제한 다음 대사간, 강원도 관찰사, 이조 참판,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김기현(金箕絢)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 자는 성소(聖素)이다. 1799년(정조 23) 강원도 홍천(洪川)에서 출생하였다. 1816년(순조 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음직으로 예천 군수, 대구 판관, 상주·여주·나주·진주 목사,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건립 경위]

서희순은 1833년(순조 33) 4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1834년(순조 34) 10월까지 1년 6개월간 재직했다. 관찰사로 도내를 순시할 당시 청도 지역 주민들을 위해 환곡 문제를 처리해 준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1843년(헌종 9) 불망비를 건립하였다.

정시용은 1837년(헌종 3) 11월 부임하여 1840년(헌종 6) 무주 부사로 이배했다. 당시 관찰사 서희순과 관내 순시를 함께하며, 환곡 문제 해결에 일조한 공을 기리기 위해 1843년(헌종 9) 거사비를 건립하였다.

김기현은 1846년(헌종 12) 12월부터 1849년(헌종 15) 6월까지 대구 판관으로 재임했다. 『일성록(日省錄)』에 수록되어 있는 1840년(헌종 6) 암행어사 서계에 김기현이 삼등 현령 재임 때 자애롭고 진실한 것을 중요시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양리(良吏)로 볼 수 있다. 현리리의 선정비도 선정 사실을 뒷받침하며, 이배 1년 후인 1850년(철종 1) 건립되었다.

[위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 마을 입구에 있다. 3기의 비석들은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형태]

서희순 불망비 양식은 귀갑문을 돋을 새김한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은 형태이다. 전면에는 비명(碑銘)과 찬시(讚詩)를, 후면에는 설립자 명단과 간지(干支)를 새겨 놓았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230㎝, 너비 53㎝로 군내 선정비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양식이다.

정시용 거사비 양식은 농대석(籠臺石) 위에 비신과 비갓이 한 몸으로 제작되어 있다. 비갓에 당초무늬를 조각하고 그 위에 보주(寶朱)로 장식한 비좌하엽(碑座荷葉)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새겨 두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47㎝, 너비 41.5㎝이다.

김기현 선정비 양식은 농대석 위에 비신과 비갓이 한 몸으로 제작되어 있다. 비갓은 6엽의 당초무늬를 조각하고, 그 위에 보주(寶朱)로 장식한 비좌하엽(碑座荷葉) 양식이다. 전면에는 비명과 찬시를 새겨 두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86㎝, 너비 45㎝이다.

[금석문]

1. 서희순 불망비

(전면)

관찰사우재서상국휘희순만세불망비(觀察使愚齋徐相國諱憙淳萬世不忘碑)// 약봉심법(藥峯心法)/ 귀계혜택(龜溪惠澤)/ 요량노곡(料量魯斛)/ 상평한적(上平漢糴)/ 인편영복(仁徧嶺服)/ 은전달역(恩傳達域)/ 백세여일(百世如一)/ 민구재석(民口在石)[약봉 서성 선생의 심법이요, 귀계 서침 선생의 혜택이라./ 노나라 곡으로 헤아리시고 한나라 환곡처럼 공평하게 거두셨네./ 어짊은 영남 지역에 두루 미치고 은혜는 달성 지역에 전해졌네./ 백세토록 한결같아서 백성들의 칭송이 돌에 있으리라.]

도광이십삼년시월일(道光二十三年十月日)// 성조도감 유학채천락 유학최경두(成造都監 幼學蔡天洛 幼學崔擎斗)[1843년(헌종 9) 10월 일]

2. 정시용 거사비

(전면)

판관정시용거사비(判官鄭始容去思碑)// 도광이십년시월일(道光二十三年十月日)// 성조도감 유학채천락 유학최경두(成造都監 幼學蔡天洛 幼學崔擎斗)[1843년(헌종 9) 10월 일]

3. 김기현 선정비

(전면)

판관김후기현선정비(判官金侯箕絢善政碑)// 석문□□(昔聞□□)/ 금견어□(今見漁□)/ □담태수(□談太守)/ 사옹정맥(沙翁正脈)// 염독유화(念篤儒化)/ 혜편군적(惠徧軍籍)/ 속순이전(續循吏傳)/ 아명사석(我銘斯石)// 도광삼십년정월일(道光三十年正月日)[예전에 ○○ 들었는데, 이제야 ○○ 보게 되었네./ 태수를 이야기하니, 사옹의 정맥이라네./ 염려는 유교 교화를 돈독히 하셨고, 은혜는 군적 사람까지 두루 미치었네./ 이어가며 관리들이 전하고, 우리들은 이 돌에 새기노라.// 1850년(철종 1) 1월 일]

[현황]

청도군에 대구 판관의 선정비가 있는 이유는 조선 시대 풍각면 현리리는 대구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관찰사와 판관 선정비는 여타의 비석보다 크기와 양식이 화려하다. 다만 정시용 거사비는 우측 하단 일부가 훼손되었고, 비문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별도의 보호 시설이나 안내판은 없다.

[의의와 평가]

풍각면 현리리는 조선 시대 대구부 소속으로 있다가 갑오개혁과 일제 강점기의 행정 개편 당시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현리리의 비석들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근대 행정 구역 변천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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