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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64
한자 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2년 10월∼11월 -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 사건,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적극 나서라는 통보서를 보냄
종결 시기/일시 1922년 11월 28일연표보기 -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 사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이대기, 김사묵 등 4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됨
성격 독립운동|항일 운동
관련 인물/단체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이정희

[정의]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이정희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의 군자금 모집에 연루된 사건.

[개설]

1920년대 청도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독립 운동 관련 사건은 1921년 12월 신민사(新民社) 사건과 1925년 6월 다물단(多勿團) 사건 등이 있다. 그 외에 이정희(李庭禧)[매전면]는 1922년 12월 조선 독립 운동 후원 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 김인제(金仁濟)[청도읍]는 1922년 길림성 군정서 부속 흥업단(吉林省軍政署附屬興業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 홍재범(洪在範)[풍각면 동산리]은 1923년 워싱턴 회의 독립 청원 및 대한민국 임시 정부 독립 공채 모집 사건, 윤병권(尹炳權)[운문면 공암리]은 1924년 유림단(儒林團)의 군자금 모집 사건, 김진효(金鎭孝)[운문면 공암리]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사건 등에 연루되었다.

그밖에 청도 출신의 최태욱(崔泰旭)[화양면 합천리]은 1919년 11월 조직된 기미 육영회(己未育英會)의 간사로 활동하였고, 윤치언(尹致彦)[청도읍]은 1920년 9월 진주 청년 친목회(晉州靑年親睦會) 사건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강수영(姜壽永)[이서면 서원리]은 3·1 독립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 남만 통일회 후원회(南滿統一會後援會), 통의부(統義府) 등에 참가한 뒤 1927년 귀국하여 진주, 마산 등지에서 청년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은 1920년 9월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조직은 만주에 결성된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10년대 만주 지역 곳곳에 세워진 독립군 기지는 국내로부터 자금과 사람의 지원이 없으면 존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고 기여도도 높았다.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은 1922년 10월경부터 경상북도 안동, 영천, 군위, 영일, 경상남도 창녕 등 각지의 부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적극 나서라는 통보서를 보내고, 회답이 없으면 군정서가 보내온 사형 선고서를 발송하였다.

[경과]

청도 출신으로 조선 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에 참가한 사람은 이정희인데, 그는 서로 군정서 파견원인 김원식(金元植)과 연결되었다. 안동 출신 김원식은 서로 군정서 최고 지도자인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파견되었으며, 서로 군정서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는 것이 임무였다.

1921년 10월 경 이정희는 안동의 이종국(李鍾國)의 집에서 경상북도 청송군 동면 창양동의 자산가 조정식(趙定植) 앞으로 통고서를 보냈다. 거기에는 “독립운동 자금 5만원을 대구 달성 공원으로 가져올 것이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21년 11월 이정희는 이종국과 함께 조정식의 집에 가서 3만원을 요구하고, 자신과 이종국에게 각각 5천원 상당의 약속 어음을 주문하였다. 이정희는 또 1921년 10월 12일 대구 자신의 집에서 청송군 파천면 덕천동의 심호택(沈琥澤),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화남동의 권중언(權重漹),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의 조규한(趙圭漢), 청송군 부남면 감연동의 황보훈(皇甫薰) 앞으로 각각 군자금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과]

1922년 11월 28일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이대기(李大基), 김사묵(金思黙) 등 4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힘에 따라 의용단의 조직과 김찬규의 움직임 전체가 드러났다. 이에 따라 100여 명이 붙잡혀 42명이 대구 지방 법원 검사국에 넘겨졌다.

당시 경상북도 평의원으로 있던 이정희도 송치되었다. 1923년 12월 22일 이정희는 3년 형을 언도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免訴)되었다. 1926년 3년 8개월의 옥고를 겪고 출감한 이후 이정희는 일제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 대상인 ‘요시찰 인물’로 여러 차례 가택 수색과 6차례나 예비 검속을 당하는 등 감시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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