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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56
한자 啓蒙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

[개설]

대한 제국 시기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운동과 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계몽 운동은 갑신정변과 독립 협회 운동으로 대표되는 개화 자강 계열의 민족 운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개화 자강 계열의 지식인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주도한 전국의 대표적 단체는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 협회(大韓協會), 신민회(新民會) 등이었다. 계몽 운동은 국권 회복을 위한 신교육 구국 운동(新敎育救國運動)과 산업 진흥 운동(産業振興運動), 그리고 국민 계몽 운동(國民啓蒙運動)으로 전개되었다. 청도 지역의 경우에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신교육 구국 운동국채 보상 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배경]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개되는 국권 회복 운동에서 보수적인 유림들은 친일 매국노에 대한 규탄과 더 적극적인 형태의 의병 투쟁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혁신적인 사상과 행동으로 변신하여 계몽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도 지역의 보수적인 유림들 중 일부는 의병 투쟁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국권 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의 모색으로서 계몽 운동에 동참하였다.

1906년 4월 설립된 대한 자강회가 1907년 8월 강제 해산되고, 이어서 11월 대한 협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 2월 설립된 대한 자강회 청도 지회는 대한 협회로 이어지지 않았다. 1908년 3월 서울에서 교남 교육회가 설립된 후 청도 출신의 이상요(李相堯)·박병현(朴秉鉉)·박구현(朴龜鉉)·예중기(芮重基)·박순영(朴淳永) 등이 참여함으로써 청도 지역에 있어서 계몽 사상의 보급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05년 이후 계몽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경상북도의 경우에도 중앙의 계몽 운동 단체 지방 지회와 더불어 독자적인 계몽 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 청도 지역의 경우에도 독자적인 계몽 운동단체로서 운산 친목회(雲山親睦會)간친 교육회(懇親敎育會)가 설립되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신교육 구국 운동과 산업 진흥 운동이 전개되었다.

[신교육 구국 운동]

대한 제국 시기 청도 지역의 계몽 운동은 교육 흥학(敎育興學)·민지 계발(民智啓發)·상업 발달(商業發達) 등을 표방하였다. 그중에서도 교육 흥학을 최우선으로 삼고 애국 정신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여 국권 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청도군의 경우, 1907년 7월 현재로 모두 9개소의 신교육 기관에 420여 명의 학도가 취학하여 신학문을 수업하고 있었다. 1898년 3월 대성면 유호리에 설립된 사립 유천 학교(私立楡川學校)는 경상북도 최초의 신교육 기관으로 주목된다.

1905년 이후 청도 지역에는 사립 개명 학교(私立開明學校)[1905년 6월], 사립 도동 학교(私立道東學校)[1906년], 사립 의명 학교(私立義明學校)[1906년], 사립 유명 학교(私立牖明學校)[1906년], 사립 신명 학교(私立新明學校)[1906년 12월], 사립 온명 학교(私立溫明學校), 사립 문명 학교(私立文明學校)[1907년 11월], 사립 덕명 학교(私立德明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대한 제국 시기 청도군에 있어서 신교육 기관의 설립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08년 8월 일제는 사학 탄압의 방법으로 사립 학교령(私立學校令)을 공포함으로써, 학교의 설립 인가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다수의 사립 학교가 운영난으로 문을 닫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청도군의 경우에도 선각적인 자산가들이 사립 학교의 재정을 부담하는 등 학교의 운영난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더 이상의 사립 학교의 설립은 물론이고, 오히려 관립·공립 학교로의 전환이 강요되었다.

[국채 보상 운동]

국채 보상 운동 은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범국민적 운동이다.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1월 부산 상무소(釜山商務所)[회두(會頭) 서상돈(徐相燉)]에서 처음 논의되어,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燉), 대동 광문회 회장 박해령(朴海齡) 등 16명이 발기하여 「국채 일천삼백만 원 보상 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圓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발송하면서 전국 각처에서 본격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도군의 국채 보상 운동은 1907년 4월 청도군 국채 보상 의연회(淸道郡國債報償義捐會)가 조직되면서 청도 민의소(淸道郡民議所)를 장악하고 있던 선각적인 유림들이 주도하였다. 청도 지역의 유림들은 청도 민의소를 조직하고 계몽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청도 민의소는 지방 자치 조직으로 민권의 신장이나 민중 의식의 성장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통해 유림의 계몽 운동 참여가 가능하였다. 청도 민의소를 주도한 유력한 사족 가문 출신의 인사는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였다. 청도군의 국채 보상 운동은 청도 민의소를 중심으로 국채 보상 의연회를 조직한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청도 출신의 의병장 최한룡국채 보상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동참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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