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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 「청도군 지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330
한자 輿地圖淸道郡地圖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고지도
권책 6책
규격 26.5×19㎝

[정의]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여지도』에 포함된 청도 지역의 지도.

[편찬/간행 경위]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수록된 「청도군 지도」와 유사한 형태로 제작된 회화식 군현 지도이다.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와 비교해 볼 때, 지도집의 전체적은 구도는 비슷하지만, 지도에 반영된 지명에 차이가 보인다.

특히 「안음현 지도」가 수록되어 있지 않았던 『해동지도』와 달리 『여지도』에는 「안음현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안음현의 경우 1767년에 안의(安義)로 지명이 개칭되므로, 이 지도집은 대략 1736년에서 1767년 사이의 조선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서지]

『여지도』는 총 6책으로 구성된 전국 군현 지도집으로, 책의 크기는 26.5×19㎝이다. 제1책에 「요계 관방 지도(遼薊 關防 地圖)」와 「성경 여지 전도(盛京 輿地 全圖)」, 제6책에 「조선 여진 양국 국계도(朝鮮 女眞 兩國 國界圖)」가 수록되어 있으며, 청도군을 포함한 경상도의 군현은 제4책에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의 특징은 각 군현 지도와 함께 각 군현의 지리적 정보가 기록된 주기 부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도 364장, 주기 341장 등 모두 70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성/내용]

『여지도』 「청도군 지도」『해동지도』 「청도군 지도」와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읍치의 크기이다. 『해동지도』 「청도군 지도」에 비해 훨씬 크게 그려졌으며, 따라서 읍치 안의 주요 건물들의 위치가 더 잘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해동지도』 「청도군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창(倉)과 북문 안쪽에 지(池) 등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두 번째는 읍치 왼쪽 지역의 모습이다. 이는 읍치를 다른 지역에 비해 크기를 확대하여 표현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서쪽 지역은 종이에 맞추기 위해 좁게 그려졌다. 그래서 실제로는 서남쪽으로 흐르는 동창천이 마치 남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표현되었고, 하천의 길이도 읍치를 돌아나가는 것보다 동창천이 훨씬 길게 표현되었다. 이에 반해 『해동지도』 「청도군 지도」에는 동창천 상류 부분에 ‘경주계’를 표시하여 실제 어느 정도 그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읍치 서쪽 지역도 『여지도』 「청도군 지도」보다는 실제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산맥의 회화적 표현, 경치가 좋은 입암(立岩)과 소요당(逍遙堂)의 모습, 읍치 북문 밖에 율전(栗田) 등은 『여지도』 「청도군 지도」가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청도군의 지지 자료에는 호구·전결·곡물·군정 등 군현의 사회 경제적 사정을 알려주는 항목들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 「청도군 지도」의 호구 수가 7,280호인데 반해, 『여지도』 「청도군 지도」의 호구 수는 8,061호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이외에 내용은 거의 비슷하며, 형식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데, 이는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광여도 (廣輿圖)』에 기록된 지지적 주기 부분과 유사하다.

『해동지도』와 같이 당시 지도를 제작할 때 각 군현과 관련된 지지적 자료는 대부분 지도의 여백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여지도』는 지도와 지지적 자료를 분리하여 제작하였다. 이는 『해동지도』에 수록된 지도들보다 작은 크기의 종이에 제작하면서, 지도의 복잡함을 줄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여지도』 의 특징 중 하나는 『해동지도』와 반대로 각 군현 지도에 도로 표시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의의와 평가]

1750년대에 관찬에서 제작한 『해동지도』와 전체적인 지도 구도 및 내용이 유사한 지도이며, 『광여도』와도 유사하다. 그러나 3종의 지도집을 비교해 보면, 지명과 같은 지리 정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이는 이 시기에 제작된 군현 지도를 통해 18세기의 변화하는 조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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