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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도』 「청도 지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327
한자 一八七二年地方圖淸道地圖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성격 고지도
규격 36×25㎝

[정의]

1872년에 제작된 군현 지도 중 청도 지역의 지도.

[개설]

1872년에 제작된 지방 지도 중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일대 지도이다. 지도 우측 상단에 지도명인 ‘청도(淸道)’가 표기되어 있으며, 지도의 상단은 지리상 동쪽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리상 북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면 동서로 긴 청도군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

[편찬/간행 경위]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18세기 조선은 정치적으로 각종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었다. 특히 실학을 비롯하여 문화·예술 부문에서도 많은 성과가 축적되었고, 지도 제작 역시 조선 시대에서 최고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19세기로 넘어가면서 조선 사회는 세도 정치로 말미암아 정치적 혼란과 삼정의 문란 등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는 민생의 안정을 위협하였다.

그리고 관료 사회의 부패는 국가 정치의 부패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군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양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국방과 치안을 위한 관제 개편, 군제의 개편, 군사 시설의 확충과 경비의 강화, 군품 정비와 실험 등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지방의 실정 파악이 우선이었다. 그 결과 1871년 전국을 대상으로 읍지가 편찬되었고, 이듬해인 1872년 읍지에 이어 전국적인 차원의 지도 제작 사업이 추진되었다. 『1872년 지방도』 「청도 지도」역시 이 사업의 결과물로, 조선 시대 관찬 지도 제작 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형태/서지]

『1872년 지방도』 「청도 지도」는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시기에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군현 지도는 총 459매로, 각 도의 군현 지도는 물론 영(營)·진보(鎭堡)·목장(牧場)·산성(山城) 등을 그린 지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각 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지도의 형식면에서 통일성은 갖추지 못하였지만 지도가 담고 있는 지리적 정보는 현재 남아 있는 다른 군현 지도와 비교해 매우 상세한 편이다. 또한 지도의 형식과 더불어 크기 역시 각 군현의 크기 또는 역할이나 중요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청도 지도」 크기는 36×25㎝이다.

[구성/내용]

읍치 남문 남쪽에는 고을의 진산인 오산(鰲山)이 표시되어 있는데, 독특하게 산 모습이 아닌 자루 모양의 원에 지명을 표기하였다. 산은 청색의 담채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산의 모습을 살펴보면 읍치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즉, 산의 모습과 방향은 읍성에서 읍성 밖 산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려져 있다. 하천도 산과 같은 색으로 그리고 있는데, 산은 산줄기의 모습을 선으로 표현하고 그 위에 채색하였고, 하천은 쌍선으로 그리고 그 안을 채색하여 산과 구분하고 있다.

화양읍 동상리서상리 지역에 위치한 청도군의 읍치는 지도상에 사각형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대하여 표현하였다. 읍치 공간인 사각형 안에는 동헌·객사·군기·사창(社倉) 등의 관청의 상대적 위치를 관아 건물로 표시하였다. 사각형 외곽의 사방에는 성문을 표시하였다.

읍치 공간에 표시한 직사각형은 임진왜란 이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읍성을 표현한 것으로, 청도가 동래에서 올라오는 도로에 위치해 있는 만큼 중요 지역이었다.

그 외에 지도에는 군사 정보인 산성과 봉수대가 표시되어 있다. 오혜산성(烏惠山城), 주구산성(走狗山城), 지룡산성(地龍山城)의 경우 지명만 표시되어 있고, 봉수대인 남봉대(南烽臺)와 북봉대(北烽臺)는 지명과 함께 산의 중허리에 성곽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읍성 밖에는 사직, 성황, 여단, 향교 등을 비교적 상세히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읍성 안 동상 사창(東上社倉)을 비롯하여 고수 사창(高樹社倉)·구랑 사창(九郞社倉)·구미 사창(九尾社倉)·두곡 사창(杜谷社倉) 등 청도에 설치되었던 사창들이 빠짐없이 표시되어 있으며, 읍치까지의 거리도 함께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당시 14개의 속역을 거느리고 있었던 성현도(省峴道) 찰방역(察訪驛)과 남쪽의 유천역관(楡川驛館) 등도 도로 옆에 표시되어 있다. 또한 읍치인 상읍면에 읍장(邑場)을 포함하여 차읍면 성현도(省峴道) 옆에 표시된 성현장, 동북쪽인 중동면의 동창장(東倉場), 이위면의 대천장(大川場), 외서면의 구좌장(九佐場)이 홍선인 도로 주변에 표시되어 있다. 조선 시대 장시는 대부분 오일장으로, 30∼40리의 거리를 두고 상인들이 각 장시를 번갈아 돌아가며 물건을 매매하기에 편리하도록 짜여 있었다. 조선 후기에 장시 숫자가 전국적으로 늘어나, 19세기 전반에는 1,000개가 넘는 장이 생겨났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 지역의 지리적 정보를 상세히 담고 있으며, 산천의 지리적 모습까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청도군의 읍치 내부의 모습은 물론 각 면의 상대적 위치와 거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행정·군사와 관련된 정보를 포함하여 창고, 사창 등의 경제적 기구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각 면과 면에 연결된 도로를 따라 장(場)이 표시되어 있어 19세기 후반 청도군의 모습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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