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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217
한자 西芝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서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윤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서지리 개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연표보기 - 서지리 운문댐 건설로 수몰
성격 법정동
면적 8.52㎡
가구수 0가구
인구[남,여] 0명[남자 0명, 여자 0명]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자연 마을로는 서지(西芝)[서호(西湖)]와 구복리(龜伏里, 求福里), 가곡(佳谷)[가래골], 공수리(公需里)가 있었으나, 운문댐 축조로 수몰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는 마을이 되었다.

[명칭 유래]

서지는 원래 서호(西湖)라고 했고, 뒤에는 서소(西沼)라고도 했다. 다음에 서지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되었는데 서지(西池)라고 해야 할 것을 서지(西芝)라고 쓴다. 모두 서쪽에 있는 웅덩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얘기로는 서호(西湖)에는 물이 깊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고, 안에 들어가면 물이 휘돌아서 용이 숨어 있다가 사람이 들어가면 잡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용의 방이라고 해서 큰 용방이라고도 불렀다.

구복리의 본래 마을의 이름은 구부랭이였다. 마을 뒤편 골짜기와 옆의 산이 불쑥 내밀고 있어 길을 낼 때 도로가 깊이 구부러진 곳이었다. 이 지형(地形)의 구부러진 모습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구복이라고 했다. 구복리는 오자골이라는 골짜기에 들어 있어서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보통 구복리(龜伏里)보다는 구복리(求福里)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지명을 표기하면서 복을 구한다는 뜻으로 구복리라 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공수리의 공수라는 말은 관에서 관리하는 논들이 있는 곳을 말한다. 서호인 본 마을에서 산내천[동창천] 넘어 공수골에 입지한 마을이다. 운문사보양 국사에 의해서 중창이 되고 왕으로부터 토지 500결과 노비 500명을 하사 받을 때 함께 하사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 『운문사 사적기』에 보면 이곳이 운문면에서 가장 넓은 들이었는데, 대부분 운문사의 땅이었다고 한다. 이 들에서 수확한 곡식은 대부분 사찰에 공급되었고, 들을 공수평(供需坪)이라고 부른다. 『운문사 사적기』를 보면 이곳의 경작자와 사찰 사이에 시비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가라골(佳谷)은 먹방산 아래에 있던 골짜기로, 경작지가 좁고 떡가래 같이 길게 생긴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방 후 6·25 전쟁 전 시국이 극도로 혼란할 때 주민들을 하산케 하여 마을이 없어진 곳이다. 이 계곡의 안길로 깊이 들어가면 오진리로 넘어 가는 길이 있다.

왕재는 서호에서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설총이 고향에 있을 때 왕이 외손자를 보기 위해서 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왕이 넘어간 고개라 해서 왕재라고 한다고 하는 데 신빙성은 없다.

[형성 및 변천]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 역마을이었다. 본래 청도군 이위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추자동을 병합하여 서지동이라 하고 운문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서지동에서 서지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운문댐 축조로 인하여 동네 전부가 수몰이 되고 주민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고 지금은 이름만 전하고 있다. 대천리에 있는 망향정에는 이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만 비석에 적어 놓고 있다.

[자연 환경]

공암리에서 흘러온 물이 서지를 지나 대천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공암에서 크게 굽이치고 다시 서지 앞에서 크게 모여 대천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마을 앞과 뒤 모두 높은 산으로 막혀 있지만 공수 마을은 운문면에서는 가장 넓은 들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물에 잠겨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현황]

2012년 현재 면적은 8.52㎡이지만,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동쪽은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신원리·일부리, 서쪽은 운문면 대천리, 남쪽은 운문면 순지리·방음리, 북쪽은 운문면 공암리·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천리·용전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서지, 구복리, 가곡, 공수리 등의 마을이 있었다.

국도 20호선이 지나고 있다. 청도와 경주로 잇는 도로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고분의 흔적들이 알려준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역(驛)이 설치되어 이 지역이 중요한 교통 요지였음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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