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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168
한자 沙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윤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청도군 각남면 사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8년 - 청도군 각남면 사동에서 청도군 각남면 사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14.09㎡
가구수 129가구
인구[남,여] 243명[남자 110명, 여자 133명]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청도군 각남면 최남단 화악산 서북쪽에 자리한 사리골은 상사(上沙)와 하사(下沙)가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각남면 사리가 되었다.

[명칭 유래]

사리의 옛 명칭은 사을외(沙乙外)이다. 곧 살외라고 하고 산 밖이란 뜻이 된다. 『밀주지(密州誌)』에서는 화악산 밖에 있어서 산외(山外)라고 하였고, 『대구읍지(大邱邑誌)』에서는 사외리(沙外里)로 표기되어 있다. 소리나는 대로 받아 적어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형성 및 변천]

고려 시대에 밀양군 풍각현 현동면일 때의 이름은 산외라 표기하고, 속칭 사을외(沙乙外)[사뤼]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1601년 이후 대구진 풍각현일 때의 동명은 사외리(沙外里)로 때에 따라 이름이 달라졌으나 뜻은 같다. 이후 1906년 청도군으로 되면서 각초동면(角初同面)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내사와 외사를 병합하여 사동이라 하여 각남면에 속하였다. 1988년 사동에서 사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화악산(華岳山)과 오산(鰲山) 사이에서 발원한 부곡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상당히 높은 지대에 자리하였다. 경작지는 대부분 다랑논을 이루고 있으며,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진 개울 좌우로 만들어진 논은 아직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화악산 계곡의 비수덤은 과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청도읍 상리에서 사리로 가기 위해서는 밤티재를 넘어야 하는데, 글자 그대로 밤나무가 많아서 밤티라고도 한다. 지금도 토종 밤나무가 많이 있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은 14.09㎡이며, 총 129가구에 243명[남자 110명, 여자 13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화양읍 교촌리·청도읍 상리·청양리, 서쪽은 각남면 녹명리·함박리, 남쪽은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요고리, 북쪽은 각남면 신당리·구곡리·일곡리·화리·칠성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는 사 1리사 2리가 있다. 상사와 하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사는 사 1리이고 상사는 사 2리이다.

대형 우사가 들어서 있고, 한재에서 시작한 미나리 농사를 이곳에도 많이 짓고 있다.

청도읍 상리각남면 사리를 잇는 지방도 902호선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이 지방도를 따라 풍각 순환 버스와 사리에서 풍각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는 사동∼풍각 버스가 지나간다. 또 사리는 청도군 시내버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밤티재는 밀양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풍각을 거쳐 대구로 가는 지름길이라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교통이 편리해져서 이 고개를 걸어 넘는 사람이 많지 않아 폐쇄되다시피 했다가, 최근에 도로 확장과 포장을 하면서 드라이브 코스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윗사리에는 충성스런 하녀를 기리기 위한 충비가 하나 전해진다. 과거 어느 해 홍수가 났을 때 젊은 남자 주인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본 아내가 남편의 허리를 안고 건지려 하다가 함께 떠내려가자 함께 있던 하녀가 안주인의 허리를 잡고 함께 떠내려갔다. 이후 물이 빠지고 시신을 건지고 보니 세 사람이 함께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녀를 위한 비를 세웠다고 한다.

사리에는 또 곽당 할매 사당이라고 하는 사당이 전해진다. 이 사당은 함박리사리의 중간 산꼭대기에 있는 사당으로 주변에서는 삼신 할매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예전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할머니가 신당리[곽당]에서 살았다 해서 곽당 할매라고 불렸다. 할머니는 처녀로 늙었는데 인근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의탁할 곳 없이 살았다고 한다. 또 동네 아낙들이 아이를 낳으면 해복(解腹) 구완[병수발]도 해주고, 아이들이 아프면 푸닥거리도 해주었는데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손만 가면 아픈 몸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은 곽당 할매를 삼신 할매라 부른다. 곽당 할매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할머니를 기리며 장례를 치루고, 봄에는 사리에서 가을에는 함박리에서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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